'2025/02/20'에 해당되는 글 1건
-
2025.02.20 ::
2025.02.21(금) 눅 5:27-39
눅 5:27-39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에겐 '세리 마태'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27절을 보면.
"그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
세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랐다고 한다.
참 재밌는 말씀이다.
세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이렇게 급진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을까.
베드로와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께서 만선의 꿈을 이뤄주시는 것을 보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따랐는데.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극적으로/급진적으로 그를 따라갈 수 있었을까.
그래서 궁금함이 들었다. 질문이 들었다.
"어떻게 그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이렇게 빨리/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리의 삶을 생각해 봤는데.
아마도 세리는. 순간적으로/즉흥적으로 결정하진 않았을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자기의 '직'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혐오와 멸시를 받는 직업이긴 했지만.
세리는. 그에게. 안정된 직장/일터였다.
그렇다면. 세리는 도대체. 뭘 보고 예수님을 이렇게 따르게 됐을까?
그것은 세리의 삶에. 이미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의 삶에 고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 본문 앞부분을 보면.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중풍병자의 네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치시고. 그에게 죄사함의 은총같이 같이 허락해 주시는데.
세리는 이 소문을 듣고. '이분이 뭔가 심상치 않은 분'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세리는 이 일을 두고 고민하기 시작하는데.
마음 속에서는. 또 다른 생각/가치관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내가 예수를 따라도 될까?
내가 예수를 섬겨도 될까?
그분이 나같은 사람을 받아주실까?
이 일은. 내 삶의 전부를 드려도 아깝지 않은 걸까?"
그래서 세리는. 지금 세관 앞에 앉아 있지만.
자기가 해야 할 것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인생에 대한. 수많은 물음과 질문 앞에 서 있는데…
그때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따르라"
그래서 누가는. 이 일에 대해.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라고 얘기하는데.
이것은 단순하 응시나 눈마주침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떤 목적과.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실제로 여기서 '보시고'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데아사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눈여겨 보심을 뜻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그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그의 마음 가운데 있는. 그의 갈증과 목마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리는.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는데.
그게 오늘 본문 27절과 28절에 기록된 이야기다.
근데 오늘 본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세리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거기서 큰 잔치를 베푸는데.
그 자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함께 하고 있었다.
단순한 잔치가 아니였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면? 마가복음 2장 15절이 그것을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가복음 2장 15절을 보면.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다음 내용을 보면.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를 따름이러라"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들은.
그냥 먹고 마시기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예수의 소식을 듣고.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여기 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세리는 문둥병자는 아니지만. 그만큼 가까이해서도 안 되고.
만져서도 안 되고. 상종해서도 안 될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우리 주님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친구 삼으시고.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 나누시니.
그들 입장에선. 이보다 더 큰 축제와 기쁨이 어디 있겠냐고.
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리새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바리새인의 눈은 그들의 심연을 들여다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겉모습을 보고. 책을 잡고 비판하기에 앞선다.
그래서 오늘 본문 30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제자들에게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딴지를 걸고.
33절에.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라고 하면서.
비난의 목소리와 책망의 목소리를 더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오늘 예수님의 모습과. 바리새인의 모습이 참으로 다른 것 같다.
한 쪽에서는. 그들의 심연을 바라보며. 그들의 마음을 바라보는데.
한 쪽에서는. 그들의 겉모습을 바라보고. 그들을 향해. 낙인과 비난의 목소리만 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함께 생각해 보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1-32절)"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
오늘 우리는 개인의 경건과 거룩을 지키기 위해.
문둥병자/나병환자와 같은 사람들을. 멀리 두고. 축출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오늘 우리 주님이 그들의 친구가 되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을 품어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
머리로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하기가 참 쉽지 않다.
우리의 생각과 관습이. 예전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의 시선이 걱정되고 염려되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는. 머뭇거리고. 눈치를 보고.
이리저리 살피고. 기웃거릴 때도 참 많은 것 같다.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정죄하고 비난할 때도 있는 것 같다.
왜 당신은 저런 사람들과 어울리냐고. 손가락질 할 때도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세상과 점점 더 멀어지고. 동떨어져 갈 때도 있는 것 같다.
주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새 포도주를 허락하셨는데.
우리는. "묵은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찾지 않는" 그런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보는데.
마음 한 켠에 답답한 마음이 밀려온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오늘 조국 교회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오늘 나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고.
오늘 나는. 그들 마음 가운데 있는. 그들의 열심과 그들의 중심을 보지 못하고.
그들의 겉모습과 그들의 행동만 보고.
그들을 쉽게 판단하고. 그들을 쉽게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아침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할 따름이다.
오늘 주께서 우리 가운데.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혀주셔서.
우리가 사람들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그런 우를 범하게 하지 않게 하여주시길 소망하며.
오늘 우리가. 형제자매의 속마음을 보고.
그들의 중심과 그들의 갈망을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은혜. 그런 복된 눈을 주시길 소원한다.
주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길 원하며.
오늘 우리가. 형제자매를 비난하고 판단하기 이전에.
그들을 향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용납하는.
그런 은혜. 그런 복된 마음 주시길 소망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세균'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멸균실/멸균실 같은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 '건강한 몸을 이루고. 건강한 면역'을 가지고 있는.
그런 우리 교회가 되길 소망하며.
오늘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오늘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소망한다.
그렇기에. 이 아침.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이 찬양의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길 원한다.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온전한 눈짓으로.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곁눈질 하긴 싫어요.
하지만 내 모습은 온전치 않아. 세상이 보는 눈은.
마치 날 죄인처럼 멀리하며. 외면을 하네요.
주님 이 낮은 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당신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 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 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 가운데.
우리의 눈을 밝히시고. 우리의 귀를 밝혀주시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도.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feat. 똑바로 보고 싶어요)
'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5.02.20(목) 눅 5:12-26 (0) | 2025.02.19 |
---|---|
2025.02.19(수) 눅 5:1-11 (0) | 2025.02.19 |
2025.02.18(화) 눅 4:31-44 (0) | 2025.02.17 |
2025.02.17(월) 눅 4:14-30 (0) | 2025.02.16 |
2025.02.16(주일) 눅 4:1-13 (0) | 2025.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