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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2.16 :: 2025.02.17(월) 눅 4:14-30
  2. 2025.02.16 :: 2025.02.16(주일) 눅 4:1-13

눅 4:14-30

오늘날 극우 기독교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어떤 이들은. '파시즘의 도래'라고 말한다.
나 역시 이 생각에 동의하는 바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극단적 민족주의를 지향하며.
폭력과 배타적을 일삼는 이들을 보면서. 이들이 어찌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특히. 부산에 있는 모 교회에서는.
설교 제목을 한 정치가의 이름을 본따서.
이 사람이 절대로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된다는 말을 일삼고 있는데.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 같다.

어제는 한 유명 목사님의 설교가. 매스컴을 타게 됐는데.
극우 보수 유튜브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한다.
참으로 걱정되는 일들이다.

'세이브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국가비상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이건 나라를 구하는 게 아니라. 나라를 반쪽 내는 것 같다.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이름으로 모여서.
정치적인 이야기와. 자기들의 관심사/생각들을 쏟아내는데.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다.

어제는 광주에서.
세이브 코리아. 국가비상기도회를 열었는데.
정말 많이 걱정이 되고. 비참한 기분이 든다.
어찌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사람들이.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게 오늘 우리 사회는. 일부 극우 기독교 세력의 선동 때문에.
많은 이들이 아파하고. 통곡하고 있다.
그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 복음이 막히고.
오늘 이땅 가운데. 복음 전도의 길이 좁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보가 눈에 띄는 것같다.

실제로.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우리 주님이. 이사야의 글을 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눈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에 대해. 사람들이 달갑지 않게 여기고. 불편하게 생각했다.

"니가 뭔데 우리에게 그런 소리를 하냐"고 하며.
"니나 잘하고. 니가 다른 곳에서 한 바를. 여기서 행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거기서 당신의 일을 행하지 않는다.
아니. 행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행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이 고실 수 없는 사람은.
"자기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과. 자기에게 시간을 주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을 고칠 수 없는데.
오늘 이스라엘 백성이 그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나사렛 높은 곳에 있는. 산 낭떠러지에 예수님을 끌고 가는데.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서. 꿋꿋이/묵묵히 지나가신다.

그래서 오늘 본문 29절과 30절을 보면.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지나서 가셨다(눅 4:29-30)"고 하는데.
오늘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부르심이 아닐까 싶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며. 핍박하는 이들 가운데서.
오늘 우리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오늘 우리를 위협하고. 오늘 우리의 생명을 해하려는 자들 가운데서.
우리가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떳떳하게 맞서 싸우며.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 나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성실히 살아가는 것.
그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닐까 싶고.
그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목표가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오늘 아침 말씀을 보면서.
"그들 가운데로. 묵묵히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함께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오늘 이것을 나의 기도로 삼게 된다.

"주님. 오늘 우리에게.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주님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고.
오늘 우리 앞에 놓여진. 삶의 어려움과 환란들 앞에서.
오늘 우리가 주눅들고. 뒤로 물러서지 않게 하여 주시고.
오늘 우리가 주와 동행하며. 주와 더불어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기에. 이 아침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오늘 하루의 삶을 의탁하기 원한다.

"나의 가는 길. 주님 인도하시네.
그는 보이지 않아도. 날 위해 일하시네.
주 나의 인도자. 항상 함께 하시네.
사랑과 힘 베푸시며. 인도하시네.

내가 걸어갈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되는.
그 곳에서 예배하네.
내가 걸어갈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되는.
그 곳에서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우리 주님의 길을 따라가며. 우리 주님의 길을 소망하며.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주님 앞에. 겸손히 의탁하여 드리길 원한다.

(feat. 나의 가는 길/부르신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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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he Sabb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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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4:1-13

세상은 끝임없이 우리에게. <입증>하라고 말한다.
"만약 니가 누가라면. 이걸 증명해봐.
만약 니가 이러이러하다면. 이걸 입증해봐."

그래서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과열 경쟁'과. '입증/스펙'을 요구하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탄식하고 있다.

"내가 언제까지 나를 입증해야 하나.
내가 언제까지 나를 주장해야 하나.
세상은. 나를 향해. 소리를 높이고 찬사를 보내다가도.
한순간에 돌변하고.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게. 세상 여론인데.
나는 언제까지. 그 속에서. 탄식하며 슬퍼하며 살아야 하나"

하지만. 우리의 목소리는 이내 잠기고.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세상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력서 한줄에 적힌 글자로. 나를 평가하기 원하고.
우리의 어떠함. 우리의 됨됨이보다.
우리의 자격과 스펙. 우리의 능력을 더 요구하기에.
우리는 그 속에서. 탄식하며 슬퍼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마치. 다람쥐 챗바퀴 돌듯이.
오늘 우리를 옥죄이고. 오늘 우리를 갉아먹게 되는 것이다.


목회 현장도 마찬가지다.
담임목사를 청빙할 때는.
이분이 어느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주목하게 되고.
그분의 학력과. 그분의 이력을 우선적으로 보게 된다.

물론. 짧은 시간 안에 이분을 평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력을 주목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못내 속상하고. 아쉽게 느껴진다.

"정말 그게 최선일까. 정말 그게 좋은 걸까.
대형교회 있었다는 것이. 그 사람을 보증해 주는 게 아닌데.
왜 우리는 속고 속으면서도. 계속 속임을 당하려 하는 걸까"

하지만. 우리는. 한번도 목소리를 내기보다.
침묵하고. 조용히 있기를 선택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해봐야. 분란만 일어나고. 교회가 시끄러워지기 때문이다.
괜히 내가 나섰다가. 내가 총대를 메야할 것 같고.
그렇게 할 바에야. 조용히 있고. 침묵하기를 선택하는 것 같다.

설교 현장에서. 자기를 드러내려는 욕망은.
나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설교를 들었는지.
조회수는 어떤지. 좋아요는 얼마나 눌렀는지.
끊임없이 자기를 살피고. 돌아보려는 우리의 욕망은.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보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더 요구하는 것 같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끊임없이 인터넷을 들락날락 거리며 눈길이 가는 것은.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죄된 본성이.
우리에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노래를 듣고.
사울이 빡쳐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끊임없는 비교 의식과 자기 과시의 욕구가.
오늘 우리 가운데.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아침 말씀을 보는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말씀이. 계속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끊임없이 세상은 우리에게.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입증하라고 얘기하는데.
우리는 그 목소리에. 속아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신 다음. 그 다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는 음성/평가를 들은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사역을 하시기 전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니라"는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드러내고. 우리가 무언가를 입증해 내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우리가 아무 것도 드러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인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네가 하나님의 자녀이어든. 이러이러한 것들을 증명하고. 드러내라"는.
세상의 목소리에 속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 말씀하시고. 오늘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는"
우리 주님의 눈을. 조용히 마주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을 드리기 원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 듣기 원하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바위 틈 은밀한 곳에서. 듣기 원하네.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자기를 입증하고. 자기를 드러내려는.
우리의 헛된 욕망. 우리의 헛된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우리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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