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3:1-14
세례 요한이 등장한다.
그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로.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었는데.
그에게는 이런 부르심이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주의 백성을 준비하며. 그들이 돌아오게 하리라(눅 1:16-17)"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려 함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기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4-6절)"고 하였는데
오늘 세례 요한을 통해. 그 길이 예비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 또한 이루었다.
말라기 4장 5절과 6절을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 4:5-6)"고 하였는데.
오늘 세례 요한을 통해.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수많은 사람이 요단 강으로 모이게 되는데.
세례 요한은 그 자리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좋은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듣기 싫은 소리/원치 않는 목소리를 전하였다.
실제로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요한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사람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말하는데.
이 말을 듣고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독사의 자식이란' 말은. '개'라는 표현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사람들에게 하던 말인데.
어찌하여 그 말을. 우리 유대인들에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세례 요한은. 거침없이 복음을 전하였다.
"너희가 속으로 아브람의 자손이라 말하며.
너희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거룩한 백성 주의 자녀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삶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이다.
근데 재밌는 것은.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질색하고 떠날 법 하지만. 어느 누구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아온다.
실제로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 하리이까(10절)"라고 말한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12절)"라고 소리치고.
그 가운데는. 로마 군병/군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요한에게 엎드려.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14절)"라고 하는데…
그들의 반응이 마치.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모습과 같다.
실제로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베드로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 37절을 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라고 하는데.
이것이 복음 앞에 주어진. 성도의 마땅한 반응이다.
복음이 우리 안에 심겨지면.
우리는 그 빛 앞에. 어찌할바를 알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빛이 우리 영혼에 내리쬐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죄들이. 우리 마음을 깊숙히 찌르고. 고통하게 되며.
이전에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이 정도면 괜찮지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님 빛 앞에서는. 아무 것도 자랑할 수 없는 것들이 된다.
그래서 이사야 6장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을 본 이사야 선지자가.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보았다(사 6:5)"고 절규하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무 것도 자랑할 것 없고.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호와의 빛 앞에 서니. 오늘 우리 모습이 얼마나 패역하고 부정한지 알게 되는 것이며.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의 도우심/자비가 없이는.
하나님 앞에 한 치도 살 수 없고. 하나님 앞에 한 치도 설 수 없음을.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사람들이 자복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는데…
나는 오늘 이 말씀이.
오늘 우리 공동체의 복이 되고. 오늘 우리 공동체의 기도가 되면 좋겠다.
실제로 오늘 내가 목회자로서.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먼저는 그 여호와의 빛이. 오늘 나의 심령 가운데. 깊이 임하면 좋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리저리 피하며. 요리조리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 앞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삶의 열매를 맺는.
그런 나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영혼이 벗겨지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영혼이 거듭나는.
그런 주의 자녀. 그런 목회자 되고 싶다.
오늘 우리 공동체를 향한 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오늘 우리 가운데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말할 수 없는 탄식'과 '말할 수 없는 기쁨'이 함께 흘러나온다.
하나님 앞에 오늘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더럽고 흠이 가득한지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도저히 설 수 없다고. 절규하며 탄식하는 눈물의 기도를 드리게 되고.
그 하나님의 빛이 오늘 우리를 감싸고 용납해 주시기에.
오늘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의 노래 또한. 함께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설 때면.
우리는 주체할 수 없는 이 두 감정을 함께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부흥'이다.
부흥이라는 것은. 수적으로 확대되고. 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오늘 우리 가운데 주의 말씀이 선포됨으로.
오늘 우리가 주의 거룩한 열망을 닮아가며.
오늘 우리가 주의 거룩한 자녀로 빚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부흥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아침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하나님 앞에 구하고. 또 간구하는 한 가지는.
주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부흥의 역사를 허락해 주시길 원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심령에서부터. 하나님의 부흥.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임하며.
오늘 우리의 가정과 삶터와 일터와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펼쳐지길 소원한다.
그렇기에 이 아침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을 드리길 원한다.
"주 예수의 얼굴을 구하며. 예배하는 세대 일어나.
주 위해 살며. 주 위해 죽으니.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
살기 위해 주 따르지 않고. 죽기 위해 주를 따르며.
내 가진 것 모두. 주를 위해 드리리. 주님의 일 행하시옵소서.
다시 한번 부흥을 주소서. 주의 나라가 이 땅에 다시 세워지는.
그 영광을 우리 보게 하소서. 주 예수의 영광을.
다시 한번 부흥을 주소서. 주의 나라가 이 땅에 다시 세워지는.
그 영광을 우리 보게 하소서. 주 예수의 영광을"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 가운데.
주께서 부흥의 불꽃을 일으키시며.
오늘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의 삶을. 겸손히. 주께 의탁하길 원한다.
(feat.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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