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19'에 해당되는 글 2건
-
2025.02.19 ::
2025.02.20(목) 눅 5:12-26
-
2025.02.19 ::
2025.02.19(수) 눅 5:1-11
눅 5:12-26
오늘 본문을 보면. 두 명의 아픈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나병 환자'고. 한 사람은. '중풍병자'다.
두 사람 다 각각 심각한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나병 환자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당했으며.
중풍병자는 자기 스스로 몸을 움직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속죄함을 받는 일에 있어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그들은. 각각.
영적인. 사회적인. 정서적인. 육체적인 어려움을 안고 있었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들이 나음을 입고. 해방을 겪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근데 재밌는 것은. 이일이 그냥/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수고와 섬김/헌신을 통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보면. 예수님이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고 있다.
그 당시 나병환자는 사람들과 접촉을 엄히 금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나병환자를 만진 사람은. 부정해지고.
이스라엘의 율법을 따라. 영 밖으로/마을 밖으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병환자를 멀리하고.
나병환자는 자신의 신분과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레 13:38-46)'는 말을 일삼고 다녔는데.
왜 예수님은 그에게 직접 손을 대시고 그를 고쳐주셨는가.
그에게 능력이 없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는 말로 충분히 사람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앞에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실 때도. "꾸짖고. 말씀으로" 그를 고치셨고.
사람들이 몰려들 때도. 그는 말씀과 기도로 그들을 고치신 일이 있었다.
근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자기가 직접 손을 대고. 그를 고쳐주신다.
왜 그럴까? 그의 마음에 있는. 고통과 아픔/상처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였다.
그간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부정한 자로/더러운 자로/하나님의 저주,형벌을 받은 사람으로 낙인 찍혀 왔었는데.
오늘 그 낙인을 벗겨주고. 씻겨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수고를 뒤로 하고.
직접 그의 몸에 손을 대시는데.
이것이 우리 주님이 하신. 사랑과 섬김의 표현이었다.
중풍병자의 네 친구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한 사람의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중풍병자의 네 친구가. 그를 침상에 메고 예수께 달려가는데.
그들은 어떠한 수고와 노력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의 친구가. 병이 나을 수만 있다면.
어떤 수고와 노력도. 기꺼이 달게 받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침상을 메고. 거리를 행진하고(18절)"
사람이 많아 들어갈 길을 찾지 못하자.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기 시작하고(18절).
그렇게 지붕 위에서. 친구를 침상째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리기 시작하는데(19절).
아마 그들의 전완근은. 이미 터지기 직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무거운 사람을. 그 무거운 침대를.
지붕 위에서 버티고. 인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이 일을 감당한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수고가 따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수고하고 낭비하기를 아까워하지 않으며.
그렇게 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얻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싶어한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비유의 의미가 이와 같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되찾았다고 해서. 잔치를 벌이는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되찾기 위해서. 99마리의 양을 두고 집을 나서는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런 수고와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으신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와 노력도 달게 할 수 있으며.
그를 위해서라면. 내 생명과 내 시간과. 내 물질과 내 소유를 들여서라도.
그를 얻고. 그를 되찾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아침.
말씀을 보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두 가지를 기도하게 된다.
먼저는. 오늘 우리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와 사랑의 고백이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고.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는데.
우리가 어찌 그 사랑 앞에. 감사하지 않으며.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이 아침.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감사하며. 감격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기도드리는 것은.
오늘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로. 거룩한 낭비로 드리는 것이다.
수고함 없이 어찌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해산의 고통 없이. 어찌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탄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따름이다.
오늘 우리의 기도 소리를 통해.
주께서 우리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구원과 해방의 복음을 선포해 주시길 바라기 때문이며.
오늘 우리의 섬김과 수고를 통해.
오늘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아침.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이 찬양의 고백으로 서길 원한다.
"우리 죄 위해 죽으신 주. 십자가 그 사랑 감사하네.
날마다 주의 형상대로 변화되리라. 십자가 우릴 새롭게 하리.
놀라운 사랑 찬양하리라. 우리를 위해 생명 주셨네.
놀라운 사랑 찬양하리라. 십자가의 그 능력"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우리 죄 위해 죽으신 주)
'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5.02.21(금) 눅 5:27-39 (0) | 2025.02.20 |
---|---|
2025.02.19(수) 눅 5:1-11 (0) | 2025.02.19 |
2025.02.18(화) 눅 4:31-44 (0) | 2025.02.17 |
2025.02.17(월) 눅 4:14-30 (0) | 2025.02.16 |
2025.02.16(주일) 눅 4:1-13 (0) | 2025.02.16 |
눅 5:1-11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본문이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그런 베드로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더니.
거기서 만선의 꿈을 이루고. 수많은 고기를 잡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6절과 7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그래서 이 일로 인해.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 주님이. 아픈 사람을 고치고.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그런 신적인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천하를 호령하고. 온 천하를 다스리는 하나님인 것을. 베드로가 즉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예수의 무릎 아래 앞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는데.
그만큼 베드로 입장에서는. 이 일이 큰 충격과 공포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말씀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 무슨 마음이 들었길래.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한밤중에 고기를 잡고.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었는데.
도대체 베드로는 무슨 생각으로. 주의 말씀을 듣고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게 되었을까?
이건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되게 어리석고 미련한 짓 아닌가?"
그러다 문득. 3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이건 달리 말해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어디로도 피할 수 없음을 뜻하는 말이며.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가르침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전날밤 물고기를 한마디로 잡지 못해서. 낙심했던 마음이.
소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물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해서. 낙심하고 주저 앉았던 마음이.
인생의 허무에서, 인생의 소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
샘 솟는 기쁨/고요한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고.
그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한 기대와 소망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시는데.
베드로는 이 얘기를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그물을 내린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씀하는데.
이 믿음은. 한순간에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고요히/차근차근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뒷부분을 보면.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자신있게. 용감하게 그 길을 따라간다.
말씀이 베드로 안에. 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분을 따라 가면. 오늘 우리 인생 가운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라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오늘 우리 인생 가운데. 아무리 깊은 곳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의 말씀보다. 더 깊고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인생 가운데. 아무리 어렵고 환란이 가득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보다 크지 않고. 우리 주님보다 깊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내가 주의 말씀을 의지하여. 내. 인생의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하는데.
오늘 이 말씀이. 오늘 우리 가운데. 삶이 되고. 기도가 되길 원한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며. 낙심하고 인생의 소망/꿈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주께서 말씀을 부어주시고.
오늘 이 땅을 살아가며. 인생의 여러 고민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주께서 소망과 힘을 더하여 주시고.
그렇게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믿음의 반석/뿌리를 내리며.
그렇게 오늘 우리가. 우리 주님과 동행하며. 우리 주님과 더불어 사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 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깊이 잠기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믿음의 반석/뿌리를 내리며.
오늘 우리의 인생 가운데.
주의 말씀을 따라.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며.
오늘 우리 인생 가운데.
주의 말씀을 따라 이 길을 걸어가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하길 원한다.
(feat. 주님 말씀하시면)
'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5.02.21(금) 눅 5:27-39 (0) | 2025.02.20 |
---|---|
2025.02.20(목) 눅 5:12-26 (0) | 2025.02.19 |
2025.02.18(화) 눅 4:31-44 (0) | 2025.02.17 |
2025.02.17(월) 눅 4:14-30 (0) | 2025.02.16 |
2025.02.16(주일) 눅 4:1-13 (0) | 2025.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