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4:1-10
로마서 11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롬 11:33)"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인간의 얕은 생각과 지혜로는.
하나님의 길을 찾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리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도 모르는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그 넓고 깊은 생각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크신 하나님의 손 아래. 겸손히 엎드리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당신의 말씀 앞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이게 참 쉽지 않다.
'머리'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걸 잘 알지만.
'몸과 마음'이. 쉽게 잘 따라주지 않는다.
위기 상황 앞에선. 더욱 그렇다.
마치. 번지 점프대 위에 선 모습과 같다고 해야 할까?
뛰어내려도 괜찮다고. 죽지 않는다고.
이 줄이 너를 꼭 지켜줄 거라고. 아무리 뒤에서 말해 보아도.
발 하나 떼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어렵고 힘들다.
왜냐면. 죽을 것 같기 때문에.
머리로는. 우리에게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지만.
심장이 이렇게 쿵쾅쿵쾅 뛰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몸이 벌써부터. 이렇게 굳어버리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머리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 또 몸으로. 그렇게 산다는 것이 참 쉽지 않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련한 처지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바락도 이와 같은 모습이다.
그 당시. 랍비돗의 아내. 드보라가 선지자/사사로 있던 시절.
드보라는. 바락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납달리 지파와 스불론 지파 사람. 1만 명을 데리고. 다볼 산으로 가거라.
내가.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그의 군대를. 너의 손에 넘겨주겠다"
근데. 이 얘기를 듣는. 바락의 몸과 마음이 심상치 않다.
머리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잘 알겠다.
이 말씀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이 말씀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근데. 두려움이 앞서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 당시. 가나안 왕 야빈은.
철 병거 900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탱크 900대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근데. 칼과 창을 든 군사 1만 명으로.
어찌 탱크 900대랑 맞서 싸우란 말인가.
이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이건. 말이 좋아 '용기/패기'지. 솔직히 말하면. '객기'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머리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이 나에게.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신뢰함으로 이 길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발걸음이 떼지질 않는다.
왜냐하면. 이 전쟁의 승패가. 눈에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객사' 할 것만 같았고.
이것은. 용기 있는 죽음/순교가 아니라. 개죽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락은. 드보라의 바지가락을 잡고 늘어진다.
"당신이 가면. 나도 가겠지만.
당신이 가지 않으면. 나도 가지 않겠소."
이것은. 어찌 보면.
믿음의 표현/간구의 표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반쪽짜리 믿음. 반쪽짜리 간구였다.
왜냐하면. 바락의 마음에는. 안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혹시라도. 드보라가. 나를 사지로 밀어내는 것은 아닐까 싶었고.
그래서. "드보라 당신이. 정말 전쟁의 승리를 확신한다면.
나와 함께 전장으로 나아갑시다"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드보라. 당신이 같이 갈 것도 아니라면.
나만 혼자. 거기 밀어넣지 말라!"는.
바락의 솔직한 마음이 거기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드보라는. 당당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내. <반드시> 장군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주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
<사실>임을 <분명히> 보여주겠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당신이 영웅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여자의 손에. 시스라를 넘겨줄 것이며.
당신은. 이 전쟁에 있어서. 들러리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운명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바락의 믿음과. 드보라의 믿음이. 서로 상반된다.
바락은. 머리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눈 앞에 있는 현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크게 보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몸과 마음이 얼어붙어서. 주저 하고 있었다면.
드보라는. 당신의 약속이 변함 없는 사실임을 알기 때문에.
믿음으로/순종함으로/기쁨으로 이 길을 떠난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홍해 바다를 가르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저 강하고 강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태가 막혔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태를 열어주셨고.
우리 주님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에.
드보라는. 당신의 말씀 앞에. 겸손히 순종하며.
믿음으로/소망함으로/확신과 담대함으로. 이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 인생을 돌아본다.
나는. 바락처럼. 반쪽짜리 인생인가.
아니면. 드보라처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신뢰를 가진.
제대로 된 인생인가.
물론. 하나님이. 그런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고.
그런 우리의 믿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발걸음에. 또 우리의 눈높이에 주님이 친히 맞춰주는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믿음이.
주님 앞에서. 자라가고. 또 온전해지고. 또 성숙해지고. 또 완전해지는.
그런 일들이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우리 인생이. 쎄 빠지게 고생만 하고.
들러리로 전락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주님이 두 팔을 들고. 우리를 마음껏 높이 들 수 있도록.
오늘 우리 삶을 내어드리고.
주님 앞에 오늘 우리의 삶을. 온전히 의탁하고 맡길 수 있는.
그런 오늘 우리 공동체 되면 좋겠다.
그렇기에. 이 시간. 이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간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오늘 하루.
그 크신 주님의 뜻과 지혜가. 오늘 내 삶에 이뤄지고 실현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한다.
(feat.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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