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4:11-24
오늘 본문을 보면. 헤벨의 아내. 야엘이 등장한다.
헤벨은. 이스라엘을 떠나. 게데스 부근 상수리 나무 곁에 장막을 쳤고(11절).
하솔 왕 야빈과. 정치적 동맹/우호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었다(17절).
왜냐면. 그게. 자기 입장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당시 하솔 왕 야빈의 힘은. 어마어마 했다.
철 병거 900대에. 강력한 군사를 거느리고.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철통 같이 지키고 있었으니.
이스라엘에 사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족속을 떠나. 하솔 왕 야빈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음 같아서는. 이스라엘을 떠나. 아예 하솔 왕 곁으로 가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는 없었고.
그래서.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북쪽으로/이스라엘 꼭대기 지역까지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거기가 어디냐면?
거기가. 게데스 부근에 있는. 사아나님 상수리 나무 곁이었다.
지리적으로는. 이스라엘 영내/납달리 지파 땅에 살고 있었지만.
사실/실제적으로는. 이미 마음이 떴었고.
그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야빈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오늘을 살아가는. 헤벨(뜻 : 헛되다).
헛된 자의 삶의 모습/결국이었다.
근데. 이 모습이 누구에게 불편했냐면?
헤벨의 아내. 야엘에게 불편했다.
"여보. 우리 이스라엘 사람이잖아요.
여보. 우리 하나님 나라 백성이잖아요.
여보. 우리 이렇게 살면 안 되잖아요.
여보. 이건 하나님 뜻이 아니잖아요."
야엘은. 그렇게 울며 불며. 남편 헤벨을 설득해 보았지만.
헤벨은. 아내 야엘의 말을 귓등으로 듣지도 않았다.
오히려. 헤벨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
시스라가 철 병거 900대를 거느리고 이 땅을 쳐들어 올 거야.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죽게 되겠지.
하지만. 우리는 달라.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밑밥을 뿌려놨는데.
시스라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하솔 왕 야빈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면. 그 땐 누가 왕이 되는지 알아?
그땐 내가 왕이 되는 거야.
하솔 왕 야빈이. 이스라엘을 내게 맡기게 될 거고.
그럼 그때부터 우린 떵떵거리며. 승승장구하며 살 수 있단 말이야.
근데 이제 와서. 이걸 포기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절대 그럴 수 없지.
내가 꿈꾸고 그리던 세상이. 이제 내 눈 앞에 와 있는데.
어떻게 내가 이걸 포기할 수 있어?
절대로 그럴 수 없지!"
그런 측면에서. 야엘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자기 얘기를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 마음 대로 살아가는 헤벨의 모습이.
야속하고.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처음에는 그가 가져다 주는 돈과 곡식들이. 좋게만 보였는데.
이제 그게 자기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이렇게 사느니. 어떻게든 이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그게. 오늘을 살아가는. 야엘의 마음이었다.
근데. 오늘 본문을 보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자기 눈 앞에. '하솔 왕 야빈의 장군. 시스라'가 나타나게 되었다.
근데 그의 꼴이 심상찮다.
위풍당당/자신만만한. 그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눈이 풀리고. 정신이 나간 것 같다.
딱 보니. 전쟁에서 패한 것 같고.
어찌어찌 목숨은 지키고. 간신히 이스라엘의 공격을 피한 것 같기는 한데.
그의 날이 머지 않았음을. 야엘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야엘은. 시스라에게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대접한 다음.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심하고 또 고심하였다.
결국. 야엘은. 여기서 결판을 짓기고. 마음을 먹었다.
'지긋지긋한' 이 생활을 여기서 끝내기로 마음에 결심을 하고.
어떻게든. 결판을 보고. 자리를 뜨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말뚝을 힘차게 박았다.
대충 대충. 설렁 설렁 한 것이 아니다.
그의 망치질 하나에는. 지난 날에 대한 자신의 속죄가 담겨 있었으며.
그의 망치질 하나 하나에는. 진작에 이 일을 청산하지 못한.
자신의 후회와 뼈저린 회개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망치질을 할 때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다짐했을 것이다.
"하나님. 앞으로는/다시는 절대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앞으로는. 절대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저와 우리 가족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 이제 지난 날의 잘못은. 여기 못 박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소원합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을 보는데.
야엘의 망치질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오버랩 되는 것 같다.
실제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신 까닭이 무엇인가?
우리의 죄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우리가 예수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잘못과 허물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시고.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릐 죄를 속죄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제서야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내가 예수를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를 거부하고. 혐오하기를 즐겨했다면.
이제는. 우리의 가슴에 치며. 주님 앞에 나아간다.
"주님.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 이제 앞으로는. 절대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기에. 이 아침.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되내이며. 주님 앞에 선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따라가는.
그런 하루 되길 소원한다.
헤벨처럼. 헛되고 헛된 것을 쫓다가.
망하고. 인생 쫑 나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아니하고.
야엘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기도한다.
오늘 하루. 주께서 나와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은혜와 소망 더해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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