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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3 :: 2025.05.14(수) 에 2:19-3:6
에 2:19-3:6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궁으로 보내며. 이런 말을 하였다.
"너의 종족과 민족을 말하지 말라"
에스더를 궁으로 보낼 때도 이 말을 하였고,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앉은 때도 이 말을 하였는데.
누군가는 이 말을 보며.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웠던 걸까?
하나님 나라 백성/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부끄럽고. 자랑스럽지 못한 일이었던 걸까?
오히려 하나님 나라 백성/유대인이라고 밝히는 것이. 더 당당하고 멋있는 일 아닐까?"
그래서 누군가는 이런 모르드개의 행동을 보면서.
"비겁하고. 정치적 야합/타협을 택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적 야합이나. 타협을 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불필요한 어려움과 괴로움을 겪지 않도록 한 것이며.
그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충성스러운 마음과 진실함으로 오늘을 살아왔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 사실을 밝혀준다.
실제로 오늘 본문 3장 1절을 보면.
"아하수에로 왕이. 하만의 지위를 높여. 함께 있는 모든 신하들 중에.
제일 높은 자리/총리의 자리에" 두게 되는데.
왕은 모든 신하들에게. "하만에게 무릎 꿇어 절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에 모든 신하들이. 하만에게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데.
이 일에 모르드개만 쏙 빠지고 있다.
그래서 이 일을 두고. 왕의 신하들이.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이 일에 순종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데.
이 질문에 대해 모르드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유다인입니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 일이 황당하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유다 사람은 지금 별 볼 일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만보다 높은 자리에. 유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모르드개의 뒤를 봐줄지 몰라도.
지금 모르드개에겐 그런 사람이 없지 않은가.
왕후 에스더가 비록 유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는 지금 왕후의 자리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고.
왕후의 자리는. 얼마든지 대체되고. 다른 사람으로 변경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유대 민족은. 페르시아 사회에서.
소수 민족/별 볼 일 없는 민족이지 않았던가.
다윗 때에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았을지 몰라도.
지금 유대 민족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온지 오래 되었고.
지금도 페르시아의 영향력 아래서. 그의 통치/그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데.
"유대 민족"이라는 것이. 무슨 도움/무슨 벼슬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오늘 모르드개의 반응은.
사람들에게 <황당 그 자체>로 다가왔을 것 같다.
자기 주제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 같고.
이것은 '용기'가 아니라. '객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이 일을 하만에게 전하게 되는데"
이 일로 인해. 하만은. 몹시 분개하고. 모든 유다 민족을 죽이겠다는 결의에 차게 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보며. 한 가지 질문/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만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가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한번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이. 모든 사람을 위해 나은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겉으로는 무릎 꿇고 절하더라도.
마음은 그에게 무릎 꿇지 않고. 절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또한 하게 된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만에게 절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세오경의 기록을 보면.
아말렉은 <야비함의 대명사>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신명기 25장을 보면. 성경은 아말렉 백성들을 소개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할 때에. 그들은 뒤에서 약한 자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이라 말하며.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런 아말렉 백성을 향해.
"내가 그들과 더불어. 영원히/대대로 싸울 것이라(출 17:16)"고 말씀하셨으며.
그 일은 사울 왕 때에도 똑같이 재현되었다.
그래서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하나님이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며. 그들의 우두머리. 아각 왕>을 반드시 죽일 것을 명령하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만이. 바로 그 아각의 후손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성경은 하만을 소개하며.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이라고 말하고.
모르드개를 향해서는.
<그는 베냐민 자손. 기스의 증손. 시므이의 손자. 야일의 아들. 모르드개>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사울 왕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사울 왕은.
<베냐민 자손. 기스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은.
단순히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그의 신앙. 그의 삶의 중심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며.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때.
"오직 나와 내 집은. 하나님만 섬기고. 주를 따르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길 바에야.
차라리 목숨을 내놓고. 죽음을 택하겠다고.
결의에 찬 마음으로. 충성스러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 나와 내 집은 누구를 섬기며 살 것인가?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는.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며. 누구를 왕으로 섬길 것인가?"
바라기는 오늘 우리의 인생이.
한 분 하나님. 한 분 여호와를 섬기는.
그런 복된 인생. 그런 복된 우리 삶 되길 소원하며.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오직 주를 높이며. 오직 주를 따라가는.
그런 복된 공동체. 그런 복된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우리 공동체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죽이시는.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두려움으로.
그를 경외함으로 살아가는" 그런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주께서 우리 가운데. 감당할 만한 시험만 허락하시고.
또 우리가 감당치 못할 때에는.
능히 피할 길을 내시고. 능히 구원의 손길을 베푸시는.
그런 복된 우리 공동체. 그런 복된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 모두의.
"왕" 되시고. "구원자" 되어 주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도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feat. 내가 주인 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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