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11-18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빈 무덤을 보고도. 이를 믿을 수 없었다.
"누가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요 20:2, 13, 15)" 생각했으며.
마가복음에서는. 그의 상황을 기록하며.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두려워 아무 말도 못하였다(막 16:8)"고 말한다.
그만큼. 예수 부활의 소식은. 그에게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두려움과 공포에 떨던 마리아가. 오늘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누가 예수의 시신을 훔쳐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며.
자기가 예수를 직접 만났고. 보았다는 사실을 이야기 한다(18절).


무엇이. 그를 달라지게 했을까?
그것은. '마리아'를 부르시는. 주님의 친밀한 음성 때문이었다.

실제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봐도. 그렇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다(14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생각하고.
'대체 예수님의 시신을 어따 둔거냐'며. 다급하게 퉁명스럽게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친밀한 음성 앞에.
그는 "선생님!!" 하고. 순간 몸을 돌이킨다.
마리아와 예수님만 알 수 있는. 둘만의 친밀한 사귐/음성 앞에.
마리아의 눈이. 뜨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요한복음에 이런 일들이 종종 있는 것 같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 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도무지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근데. 그 때 요한이 하는 말이 뭐냐면.
"저분은 주님이시다. 선생님. 라부니"하며. 소리친다.
예전에. 주께서 자신들에게 보이신 기적이 불현듯 떠오르면서.
주님을 바르게 알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된. 나다나엘과의 만남도 그러하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실 때.
나다나엘이 뭐라고 말하는가?
"라부니. 선생님. 당신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한다.
하나님과 나만 알고 있는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알고 계시니. 깜짝 놀라며. 소리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 속에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과 행간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마리아야~"
(내가 누군지 모르겠니?)

"마리아야~"
(내가 너를 고쳐줬잖아. 네가 귀신에 사로 잡혀 힘들어 할 때. 내가 널 고쳐줬잖아.)

"마리아야~"
(우리 함께 지냈던 시간 기억나니? 우리 함께 길을 걷고. 밥을 먹던 시간 생각나니?)

"마리아야~"
(네가. 지금 많이 슬퍼하고 있구나.
나는 죽지 않았단단. 나는 지금 여기 살아있단다.
내가 지금 네 눈 앞에 있지 않니. 슬퍼하지 말거라)


그런 측면에서. 말씀을 읽으며.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있기를 소망한다.

무엇이. 우리 영혼을 소생케 하며.
무엇이. 우리 영혼을 살게 하는가?

사실은.
눈에 보이는 증거와.
주변 사람들이 들려주는 수많은 이야기가 우리 영혼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 그분의 친밀한 음성이 우리를 새롭게 살게 한다.

말로 다 할 수는 없지만. 주님과 나만 아는 그 신비한 이야기.
그 이야기가. 내 영혼을 새롭게 하며.
주님과 나만 아는. 둘만의 약속. 친밀한 만남이 우리 안에 다시 회상될 때.
내 영혼이. 다시 살아나며.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주님이. 나에게 이렇게 물으시는 것 같다.

"재식아~"
(넌 지금 무얼 하고 있니?)
"재식아~"
(너의 지난 날의 섬김과 수고를 내가 기억하고 있단다)
"재식아~"
(염려하지 말거라. 나는 이전에도 너와 함께 있었으며.
지금도 함께 있으며. 앞으로도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간.
나도 주님의 옷을 붙잡으며. 이렇게 소리친다.
"라부니. 선생님!"


오늘 하루.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은혜가 있길 소원한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누구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가?

바라기는.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길 소원한다.

우리가 부를 이름은.
'라부니',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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