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1:29-40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열심'은 있지만. '거칠고. 투박한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지혜'가 없어. 일을 꼬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고.
'신앙'이라는. 명목 속에.
'믿음'이라는 명목 하에.
'자기 고집'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 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입다가 딱 그러하다.
실제로. 우리가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입다가 비록. 기생의 아들로서.
사람들에게 무시. 천대. 멸시를 받아온 게 사실이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올곧은 믿음/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믿음 때문에. 입다를 사사로 부르셨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원하셨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아니. 여기까지만 하면 좋았을 것이다.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입다의 그릇된 열심이. 입다의 서투른 열심이.
결국. 입다의 집을 파탄으로 내몰게 된다.
왜냐하면. 입다가. 전쟁을 앞두고 서원하기로.
"하나님이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신다면.
내가 암몬 자손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먼저 나를 맞으러 나오는 것은.
번제물로. 주님께 드리겠다"고 약속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그렇게 해박히 알고 있던 입다가.
하나님이 '인신제사'를 싫어하는 것을 몰랐을까?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이 '인신제사'인데.
도대체 입다는. 뭔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던 것일까?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고. 사람들이 자기를 세워주기 시작하니까.
마음이 앞서고. 흥분하기 시작했던 것일까?
아니면.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하나님께 더 잘 보이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인가?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가지고. 이 사단을 만드는 것인가.
참 쉽게 이해하기 힘들고. 어려운 말인 것 같다.
근데. 뒷부분을 생각해 보면.
입다의 이 말이. 단순한 허언/과장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입다가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제일 먼저 반겨주고. 맞이했던 사람이 누구인가?
입다의 딸. 무남독녀 자기 딸이었다.
이에. 입다는.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자기가 서원한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다는. 옷을 찢으며. 울부짖으며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이 자식아. 네가 이 아버지의 가슴을 후벼 파는구나.
왜 하필이면. 너란 말이냐.
왜 하필이면. 너란 말이냐.
내가 주님께 서원한 것이어서. 돌이킬 수도 없으니. 이를 어쩐단 말이냐."
근데. 이 말도 참 쉽지가 않다.
"왜 하필 너란 말이냐???"
그러면 다른 사람이라면 괜찮다는 건가?
만약 입다의 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들과 딸이. 입다를 제일 먼저 맞이하러 나왔다면.
도대체 어떻게 할려고 했던 것인가?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러이러한 서원을 했으니.
당신 새끼 내놓으시오"
라고. 당당히 말할 생각이었던가?
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의 연속이다.
근데. 입다의 황당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왜냐면. 입다가. 자기 딸을. 정말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드렸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이 있으니.
그 약속/서원을 지키기 위해선. 이것을 강행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서원은 무를 수 있다.
1) 왜냐하면. 이 서원이. 자기 자신을 건 서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담보로 한 서원이었기 때문이다.
민수기 30장을 보면.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무를 수 있는 큰 전제/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이 서원의 공동 책임자가.
그것을 원치 않거나. 그것이 바르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이 서원을 한 사람이. 경솔히/무리한 서원을 하였다면.
하나님 앞에서. 이 서원을 무를 수 있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2) 또.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지킴으로서 얻게 될 유익과.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얻게 될 유익을 생각해 본다면.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가치 있겠는가?
약속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인신제사로 바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아니면.
약속을 어긴다 하더라도.
사람을 살리고. 인신제사를 금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시겠는가?
당연히 후자다.
잘못된 서원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 값을 치른다 하더라도.
약속을 무르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고 반성하는 것이 먼저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입다는. 주님께 약속하신 것이 있으니.
이 약속을 돌이킬 수도 없고. 무를 수도 없다고 말한다.
이에 입다의 딸은. 두 달간의 말미를 얻고.
친구들과 마지막 애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결국. 억울한 죽음. 허망한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 결심에 따라.
죄 없는 아이. 입다의 딸이.
하나님 앞에. 희생 제물로 자신의 삶을 하직하게 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은.
'그릇된 열심. 잘못된 종교적 열심'이 갖는 위험성에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신앙이라는 명목 하에.
잘못된 생각과 판단으로 이뤄지는. 종교적 열심이.
얼마나 사람들을 위험하게 하고.
얼마나 사람들을 파괴할 수 있는지. 성경이 입다의 사례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경고하고. 또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입다와 같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지 아니하고.
주님보다. 나의 삶이 앞서지 아니하고.
오직 주께서 우리 가운데 말씀하시는대로.
그 말씀에 순종하고. 겸손히 귀를 기울이는.
그런 나의 삶이 되면 좋겠다.
그렇기에. 이 시간. 주님 앞에 이 찬양으로 나아간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오늘 하루. 그 주님이 나의 삶을 이끄시고.
나를 인도해 주시길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주님 말씀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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