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7-11:11

우리는. '입다'를 생각하면. 두 가지 사실을. 먼저 떠올린다.
하나는. 그가. '기생의 아들'이라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잘못된 서원을 함으로써.
자기 딸을 하나님께 인신 제사'로 바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입다를 생각하면.
이 두 가지 프레임/선입견 속에 갇혀서.
입다의 삶과 신앙을. 쉽게 간과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입다는. 엄연히 주께서 택한. 이스라엘의 위대한 사사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이것은. 결코. 허투루/그냥 우연이 이뤄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 본문을 보면.
주께서 입다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사사로 택한 이유에 대해.
성경이 잘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먼저 살펴보면 좋겠다.


먼저 입다의 인생을 생각해 보면. 그는 정말. 비운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입다는. 길르앗이 창녀에게서 낳은 아들이었는데.
입다는. 창녀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무리 가운데서 쫓겨나게 된다.

허나.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던가.
기생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스라엘의 유업을 이어받지 못하는 경우가 어디 있던가.
만약. 그 이유가 정당하다면. 기생 라합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입다를 쫓아내고. 그를 이지매하였다.
얼마나 억울하고 슬픈 일인가.

"내가 여기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나?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게 도대체 뭔 죄란 말인가?
그렇게 사람을 낙인 찍고. 배제하고. 팽하다니.
이게 어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그는. 그렇게. 고향 이스라엘을 떠나게 되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돕'이라는 지역에 살게 되었고.
그는 거기서. 사람들/무리를 이끌며. 어떻게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게 오늘 본문에 기록된. 입다. 그의 비천한 인생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입다는.
어찌보면. 이스라엘을 향해. 억울함과 원망을 가지고 살 수 있었다.
"내가 보란 듯이 성공해서. 당신들 눈 앞에 당당히 서고 말거야" 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었고.
"내가 언젠가 당신들에게 받은 수모를. 똑같이 되갚아 줄거야"라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었다.

이스라엘이 암몬 자손들의 손에 고통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고거 쌤통이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고.
건달 무리를 이끌고 가서. 자기 형제들에게 앙갚음을 하며.
'눈에는 눈. 코에는 코'라고 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입다는 한번도 그런 반응을 보이질 않는다.
물론. 입다가.
"당신들이 나를 미워하여. 버릴 때는 언제고.
어려움을 당한다고하여. 이제 와서 나에게 또 올 때는 언제요?"
라는 말을 하긴 하지만.
이것은. 인간적인 서운함/배신의 감정이지.
그들을 향한. 원망과 복수심의 마음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한번만 우리를 도와달라"고 무릎을 꿇고 싹싹 빌 때.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마지 못해 그들의 청을 받아들인다.

마치. 어제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
주께 간곡히 도움을 요청하고 주님 앞에 엎드릴 때.
주께서. 이스라엘이 겪는 고통을. 차마 보고만 계실 수 없었던 것처럼.
오늘 입다의 마음 또한. 그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누군가는.
입다가. "자리"를 보고 일어섰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입다가. '길르앗의 통치자'가 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뒷 골목'에서 놀고 싶지 않고.
이제는 이스라엘의 우두머리로. 힘 빡 주고. 당당하게 살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래서 장로들의 청을 들어주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 만약. 입다가. 정말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통치하길 원했다면.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자기 무리를 이끌고 가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될 것이지.
왜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입다에 대한 너무 가혹한 해석/처사이다.

2) 게다가.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에 대한 말씀을 언급하는 게. 입다 혼자 뿐이지 않은가.
길르앗 장로들은. 온통 "입다, 입다"라는 말만 하고 있을 때.
입다가 먼저. 우리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고 있다.
그리고. 11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입다는. 그가 나눈 모든 말을. 주님께 말씀드렸다"고 말이다.

이것은. 입다가 비록 형제들의 손에 의해. 이스라엘에서 추방당하고.
이스라엘에서 버림 받음을 당하였지만.
우리 주님은. 날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입다는. 언젠가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갈 생각/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형제들이 아무리 밉고 싫어도.
그는 자기 형제들을 향해 칼을 겨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믿음/소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3) 그리고 이것은. 단지 나의 억지 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바로 뒷부분을 보면.
이스라엘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경위에 대해.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소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내용이 되게 구체적이고. 신학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입다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져버렸다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무엇 있겠는가.
만약. 입다가. 길르앗의 지도자/자리에 대한 욕심만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쳐들어가서. 힘과 힘으로 싸우면 될 것을. 
왜 사신을 보내고. 왜 지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고 있단 말인가.

더욱이. 성경 기자가. 입다의 이 말을.
이렇게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기록할 필요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 필요가 없다.

하지만. 성경 기자는.
입다가 이스라엘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계기와 경위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입다가. 암몬 자손들에게. 역사 수업을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어떤 마음과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성경 기자가 직접 보여주고.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입다의 믿음을. 쉽게 평가 절하해선 안 될 것이다.

마치. 안도현 선생님이.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라고 물어보는 것처럼.
오늘 입다도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아침. 입다의 삶을 생각하며.
이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길 기도한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날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온 세상 날 몰라도. 주 예수 날 아시니.
그 넓은 품에 날 안아주시니. 나의 구주"

오늘 하루. 입다의 삶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우리를 민망케 하고.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리게 하는. 그런 말씀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나를 아나요(온 세상 날 버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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