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108:1-13
인생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는 흔들리고 요동치기 마련이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욕망/욕정을 따라 살기 쉬운 사람들이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조바심을 갖고 행동하다가.
일을 그르치고. 스스로 화를 당하기도 한다.
사울의 모습이 그렇다.
사무엘상 13장을 보면.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길갈에 와 있는데.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오지 않자.
사울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함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자 함이 아니었다.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이 전쟁을 맡겨드리기 위함이 아니었고.
그는 백성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삼상 13:8).
두려운 마음에.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린 것이다.
일종의 쇼라 할 수 있다.
자기 통제의 욕구다.
백성이 두려워하고. 떠는 것을 보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큰 일 날 것 싶어서.
불안한 마음에. 스스로 제사를 드리고. 스스로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이 왔을 때.
"당신이 정한 날 오지 않았고. 블레셋 사람이 믹마스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내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기 위해. 부득이하게 번제를 드린 것이라(삼상 13:11-12)"고 하지만.
사실 이것은. 본래 목적이 아니었다.
사울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있는 불안함과 조바심을 달래기 위해.
그래서 예배를 드린 것이다.
사울의 궁색한 변명은. 다음 장에서도 똑같이 이어진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은. 주께서 모두 소멸하고/진멸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울은 그 말씀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였다.
"아각을 포로로 잡아오고. 전리품 가운데 가장 좋은 것과 기름진 것은.
자기 소유/먹거리로 삼은 것이다(삼상 15:9)"
이에 대해 사울은 이렇게 변명한다.
"이건. 내가 가지려고 가져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려고 가져온 것이고.
다 이유가 있고. 다 목적이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궁색한 변명이다.
그렇다면. "아각 왕을 사로잡아 온 까닭은 무엇인가?"
아각도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드리고 희생제물로 삼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백성들 앞에 자신의 힘을 자랑할 목적으로 데려왔다.
"내가" 이 일을 했고. "내가" 이 업적을 이뤘다고 하면서.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 데려온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 앞에서는.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고. 다 나름대로 자기 생각/주관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이중적으로 느껴지는지.
그래서 결국. 사울은. 하나님의 심판/책망을 받게 되었다.
"주께서 당신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삼상 15:26)"고 말이다.
이에 사울이. 뒤늦게 사무엘의 바지 가랑이를 붙잡아 보지만.
이 또한 허사/헛수고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을 버리셨기 때문이다.
사울의 회개 또한. 하나님 앞에서. 눈속임/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 주님이 잘 아셨기 때문에.
그를 버리시고.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신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이.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가.
사울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다급한/조급한 마음에. 일을 그르치게 되었고.
자기의 욕망으로 하나님의 일을 포장하려고 하다가.
화를 입고. 큰 화를 초래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가.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고 엎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오늘 우리 인생의 중요한 순간 앞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며.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의 도우심을 구하며. 주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오늘 우리 인생에 가장 소중한 길이며. 가장 중요한 길이다.
하나님의 뜻보다. 우리의 뜻이 앞서지 않아야 하며.
오늘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며.
주님이 하시는 대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가 하는 말도 그러하다.
특별히.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읍으로 인도해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으로 인도할꼬"라고 하는데.
<누가> 우리를 도와주며. <누가> 우리를 인도하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이끄시고.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돌봐가신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여호와여)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라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누구의 도움. 누구의 은혜를 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그 힘을 따라. 용감히 행하리니.
<그가/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대적들을 밝으실 자이심이로다(13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뜻을 정해. 마음을 다해 기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내가 새벽을 깨우며. 주를 찬양하며.
내가 만민 중에 주께 감사하고. 주께 고백하오니.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기를 원하나이다(1-5절)"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께 마음을 정하고. 하나님께 뜻을 정하여 기도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고.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우리의 삶이. 삶의 중요한 숙제/과제 앞에.
하나님의 뜻보다. 우리의 생각이.
먼저 앞서거나. 먼저 행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엎드리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고.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우리의 생각과 욕심을. 적당히 포장하고. 적당히 둘러대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의 구원과 생명이. 오직 주께 있음을 고백하며.
주를 경외하고. 주를 신실히 따라가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고.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오늘 이 곳에 계신 성령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릴 가르치소서.
닫힌 우리 맘. 열어주시고.
주의 빛으로 밝혀 우릴 인도하소서.
주님보다. 앞서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 기다리니.
주님 손에. 우릴 드립니다. 사랑으로 인도하소서"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주님 보다 앞서지 않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며.
주께서 오늘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고.
주께서 오늘 우리의 구원이 되시고 생명이 되어주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오늘 이 곳에 계신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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