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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27 :: 2025.02.28(금) 눅 7:36-50
눅 7:36-50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어떤 사람의 집에 초대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바리새파 사람 시몬으로서.
아마 그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이름 있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 퍼지자.
"이 사람이 누군지. 내가 직접 만나보고픈" 마음에.
예수님을 초대하고. 그를 집으로 불러들이게 된 것이다.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사람의 행동이 많이 수상쩍다.
실제로 오늘 본문. 44절부터 46절까지를 보면.
이 사람이 예수님에게.
1) 발 씻을 물도 갖다 주지 않고. 2) 입맞춤도 하지 않고.
3) 머리에는 감람유도 부어주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 고대 근동에서. 매우 심각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사람들을 집에 초대하고. 환대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을 집에 초대할 때는.
깍듯하게 예를 갖추고. 정성껏 그를 접대하는 것이.
사람들 가운데 있는. 일반적인 생각/정상적인 판단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집에 들어오면.
1) 그를 찾아가 입맞춤을 하고.
2) 그에게 발씻을 물을 내어주고. 또 하인을 통해. 그 사람의 발을 씻겨주도록 하고.
3) 또 그리고 난 다음에는. 뜨거운 태양빛 때문에. 머리가 갈라지고. 피부가 상해있었기 때문에.
감람유를 부어주고. 그에게 보습을 해주는 것이. 손님을 초대하는 마땅한 경우였는데.
오늘 본문에서 이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못마땅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대하는 것이. 그에게 불쾌한 일/불결한 일이라 생각했던 것 같고.
내가 저 사람을 상대하고. 그를 우리 집에 들인 것조차도.
못마땅하고. 불편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멋쩍은 눈으로. 의심의 눈초리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마 이것은. 바리새파 사람 시몬만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49절).
실제로 오늘 본문 49절을 보면.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49절)"라고 하는데.
그들도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그 자리는. 식사 자리가 아니라.
사형장/단두대와 같은 자리였다.
어떻게든 예수를 책잡고. 어떻게든 예수를 걸려 넘어지게 하려고 하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밥이 들어가겠는가.
그야말로 예수님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와 같았고.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고.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리새파 사람 시몬의 집안 분위기다.
근데 이 모습을 보고.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그 발에 향유를 붓는다.
우리는 이 사람이 누군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성경은 이 사람을 가리켜. 단지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말할 뿐이고.
사람들도 그를 향해. '이 자가 누구인지. 이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 뿐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사람을 가리켜. '창녀'라고 생각하는데.
이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며.
또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고 있다.
이 사람은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 이유가. 크게 2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1)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창녀를 향해. 부정한 사람/음란한 여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래서 어느 누구도. 그를 사람대접하지 않았다.
오히려 곁눈질로 그를 쳐다보고.
비난과 정죄의 목소리로. 그에게 돌을 던지곤 했었다.
근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의 집에 초대 받았을 때.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눅 5:30)"고 말하는데.
이 사람도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성경이 이 사람에 대해서. 철저히 비밀에 붙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군지. 예수님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그를 사람 대접해줬고.
그의 마음에 있는 상처와 올무를 벗겨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향유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간다.
그동안 자기를 위해서. 내 인생을 위해 모아놓았던 것들을.
예수님께 드리고. 그분께 내 삶을 드리기 위해서다.
이것이 예수님을 찾아간. 그의 첫번째 목적이고.
2) 두번째 목적은.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눈초리와 시선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이 여자는 수많은 사람의 질타와 비난을 들으며 평생을 살아왔다.
그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찢어질 정도로 아픈지.
그는 누구보다 더 잘 안다.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자기가 겪었던 일을 예수님이 똑같이 겪고 있다.
예수님이 바리새파 사람 시몬의 집에 초대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에 달려가는데.
아무도 그에게 입맞추지 않고. 아무도 그에게 발 씻을 물을 내어주지도 않고.
아무도 그에게 기름을 부어주지 않을 때.
그 모습이. 이 여자의 눈에.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느껴졌을까.
그래서 그는 집으로 달려가. 향유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온다.
"아무도 예수님을 반기지 않는다면. 나라도 예수님을 반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아무도 예수님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라도 예수님을 기뻐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 곁에 서서 울며 그 발을 적시고.
자기 털로 머리털을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는데.
여기에는. 이 사람의 복잡한 마음이 함께 담겨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을 향해서. 너무 고맙고. 감사하면서도.
예수님이 이런 홀대/아픔을 겪는 것이.
너무 속상하고. 또 마음이 아픈. 그 마음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근데 이 마음이. 누구의 마음이냐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마음이다.
실제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어찌 그분 앞에 감사를 표현하지 않고. 그분을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면.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라고 노래 부르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아마 이와 같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근데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홀대 받으며. 멸시 천대를 받고 있다면.
오늘 우리가. 어찌 그것을 견딜 수 있고. 어찌 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면.
오늘 우리 안에 이 두 감정이 함께 흐르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와 찬양과. 기쁨의 눈물>과 함께.
오늘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멸시 받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 눈물의 의분>이 함께 타오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고백하며.
"오늘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원한다"고 고백하는데.
오늘 이것이 우리 삶의 기도가 되고. 오늘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분을 향한 감사와 찬양과. 기쁨의 눈물이 터져나오며.
또 이 땅 가운데. 깨어지고 무너지고. 슬픔이 가득한 일들을 보면.
우리 주님의 눈물로. 함께 애통하며. 슬퍼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성도의 기도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은 은혜. 이와 같은 자비를 구한다.
주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 앞에 내 삶을 드리고 싶은.
자원하는 마음과 기쁨의 마음을 불어넣으시고.
오늘 우리 마음 가운데. 이 땅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를 받는 이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가 주의 길을 예비하며.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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