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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2.26 :: 2025.02.27(목) 눅 7:18-35

눅 7:18-35

인생을 살아가며. 저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곤 한다.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실망하고 낙심하기도 한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고.
왜 당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당신이 침묵하고 계시는지.
혼란스럽고. 어려운 마음이 찾아올 때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런 날을 가리켜.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하였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분명히 계신다고 하셨지만.
그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그분의 임재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시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 인생에도. 이와 같은 날이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도. 그와 같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실제로 오늘 본문 18절을.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일을 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고"
"나병환자의 병을 깨끗케 하시며"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고"
"억울한 자. 눌린 자. 병든 자들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일"들을 가리키는데.

재밌는 것은. 이 소식을 듣고.
세례 요한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하고 슬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19절을 보면.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시오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하는데.
여기에는 세례 요한의 아쉬움과. 그의 물음/질문이 가득 담겨 있다.

"분명 주께서 오시면.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주의 구원이 가득할 것인데.
왜 나는 아직 여기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일까?"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로마 정부가 무너지고. 이스라엘의 국권이 회복될 것인데.
왜 아직도 우리는. 이 모양 이 꼴로 살아가는 걸까?"
"주님은 나를 잊으신 걸까? 주님은 언제까지 이렇게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가시는 걸까?"
"오늘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는. 아직 먼 것일까?
아니면. 내가 잘못 기다린 걸까?"

이처럼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수많은 물음과 궁금증을 가지고.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냈는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솔직한 감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궁금증과 의문을 가진 사람들은.
세례 요한 뿐만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때.
"그 세례를 받지 않았고"
예수께서 오셔서 사역하실 때에도.
어떻게든 시비를 걸고. 어떻게든 걸려넘어지게 하려 하였다.

그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회당 가운데. 일부러 갖다 두기도 했었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선동해서.
예수님을 절벽 끝으로 데리고 가기도 하였다.
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눈엣가시/죽이고 싶은 대상일 뿐이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3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니까.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세례 요한은 귀신 들렸다"고 하고.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며 즐기니까.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데.
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이나. 다 꼴보기 싫고.
지금이라도 당장 없애버리고 싶은. '눈엣가시/걸림돌'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의문과 궁금증. 회의로 가득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례 요한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라고 질문하며. 회의와 낙심의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고.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저놈은 내가 처음부터 꼴보기 싫었어'라고 하며. 비판과 정죄의 마음으로 가득한.
그런 오늘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근데 재밌는 것은. 이 두 부류를 향한. 예수님의 평가가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리새인과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선.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면서. 비판과 경고의 목소리를 잔뜩내시는데.
세례 요한을 향해서는. 사뭇 다른 말씀을 하신다.

실제로 24절부터 28절까지를 보면.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26절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나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는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고 얘기하는데.
예수님은 말라기에 기록된.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8절을 보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궁금증이 든다.

예수님은 대체. 뭘 보고 세례 요한을 이렇게 치켜 세우는 걸까?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나름 정당하고 맞는 말인데.
왜 하필이면 이때 예수님은 이런 평가를 하시는 걸까?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고. 전파할 때.
하나님 앞에서. "하이라이트 - 믿음의 정점"을 찍고 계실 때.
그 때 이런 말을 하시면. 참 좋으련만.
왜 하필 지금. 이 때 이런 말을 하시는 걸까?"

그래서 말씀을 보다가 궁금증이 들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평가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그게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다. 오늘 본문 19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실제로 오늘 본문 19절을 보면.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하는데.
이 질문이. 세례 요한을 세례 요한 되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오늘 이 땅을 살아가며.
주님께 낙심하지 않고. 주님께 시험들지 않을 자가. 세상 어디 있겠는가.
아마 '모든 사람'이 시험에 빠질 것 같고.
'모든 사람'이 주님을 향해. 섭섭한 마음과 서운한 마음 가운데. 빠질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중요한 것은. 그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질문 앞에.
주님 앞에 나아가 '묻고. 따지고. 항변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침묵하고. 돌아서고. 마음을 접기도' 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과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물음과 궁금증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께 질문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스스로 마음을 접고. 스스로 침묵의 길을 택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 이미 답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저놈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배은망덕한 놈/나쁜 놈이라"는 결과를 내놓고.
그 결과에 맞춰서. 예수 그리스도를 평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제단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하였던 것처럼.
"그들이 보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듣긴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딱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보고서도.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거부하는 삶을 살아왔는데.
세례 요한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질문하고. 예수님께 또 물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하는데.
여기에는 세례 요한이. 미리 자기의 생각을 제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궁금증을 가지고. <질문하는 신앙>으로. <질문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그 질문은 듣고.
<정직한 답변. 정직한 말씀>을 해 주시는데.
아마 세례 요한은. 그 얘기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 내 앞에 보이는 현실은. 비록 녹녹치 않고 어려워보인다 하더라도.
오늘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지고. 하나님의 꿈이 이뤄지는 것을.
그가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세례 요한을 향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이보다 더 훌륭한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시며.
"그는 이스라엘에 보냄 받은 여러 선지자 가운데. 어떤 사람보다 크고. 어떤 사람보다 훌륭한 자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세례 요한이 하나님께 받은. 정직한 평가/진솔한 평가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께 <질문하는 신앙. 질문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길 기도한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다시스로 도망치고. 하나님께 성내기도 하였는데.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잘못/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원하며.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정직히 묻고. 정직히 질문하였던 것처럼.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도. 하나님께 정직히 묻고.
하나님께 정직히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런 복된 공동체. 그런 복된 나의 삶 되길 소망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나의 생각과 나의 뜻과. 나의 주장'을 하나님 앞에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말씀 앞에. 겸손히 청종하고. 겸손히 무릎 꿇을 수 있는.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 되길 소망하며.

오늘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 넘어지고 일어섬을 반복함으로.
그렇게 오늘 우리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더 단단해지고.
하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소망한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이곳에 임하신 하나님 나라. 가난한 맘으로 바라보리라.
먼저 그 나라. 그 뜻 구하며. 나의 삶 드리리.
주님이 맡기신 하나님 나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리라.
하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완성될 그날까지.

믿음 다하여. 그 위에 서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무너지지 않으리.
믿음 다하여. 그 나라 세워가리라.
주님 곧 오실 때까지"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정직히 주님 앞에 나아가 질문하며.
정직히 주님 앞에 나아가. 주의 음성을 듣고. 주의 말씀 앞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의 삶을.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주님이 맡기신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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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he Sabb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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