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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3:1-16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는데.
오늘 나는 거기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하나님의 사람은 죽어서. 신앙을 남긴다"고 말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모습이 그렇다.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 이제 하나님 앞에 돌아갈 때가 되었는데.
그때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6절)"
이것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다음을 잇는. 리더로 부름 받을 때.
그때 우리 주님이 주신 말씀이다.
"너는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자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고 하셨는데.
여호수아가 그 말씀을 바르게 지켜 행했더니.
정말 주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복을 주시고 평화를 주셨음을 맛보고 확인하고 난 다음에.
이것을 유언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마지막 당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호수아가 덧붙이는 말이. 7절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
7절 말씀을 보면.
"너희 중에 남아있는 이 민족들 중에 들어가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들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7절)"고 되어 있는데.
재밌는 것은. 이 일들이. '점층법으로/점진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1) 너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민족들 가운데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2) 혹시라도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 민족들 가운데 들어갔다면.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그들과 가까이 하지 말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며.
3) 혹시라도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들 가운데 들어가고.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불렀다면.
그들의 이름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며.
4) 혹시라도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들 가운데 들어가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이방 신들 앞에서 맹세하였다면.
오늘 하나님 앞에서. 그것들을 섬기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어디까지는 해도 되고. 어디까지는 하면 안 된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너희가 잘못하고. 죄를 범하거든.
<지금이라도 당장 돌이키고. 지금이라도 당장 그곳을 떠나기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죄는 우리를 빨아들이는 늪과 같아서.
한번 빠지고 거기 허우적 거리기 시작하면.
더 깊은 곳으로/더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하기 때문에,
우리가 헤어나올 수 없는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들기 전에.
하루 속히 그곳을 나오고. 도망칠 것을.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하고 잇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호수아는. 마지막 유언을 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인다.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만약 너희가 돌아서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주께서 너희의 올무가 되고.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서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될 것이라(11-13절)" 말씀하시는데.
"그 끝은 오늘 우리의 파멸이 될 것이라(13절)"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선한 말씀만"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불길한 말씀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복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배반하며.
주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화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애굽기 19장 5절과 6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19:5-6)"고 말씀하시는데.
그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창조주 하나님/구원의 하나님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 한분만" 섬기기를 바라시며.
오늘 우리가 딴 데 마음을 품고. 딴 곳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오직 주님만" 섬기길 바라시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이와 같은 복을 누렸으면 좋겠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가 딴 마음을 품고. 다른 곳에 기웃거리는.
그런 이중적인 태도로. 이중적인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좋겠다.
혹시 오늘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지거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돌이키고. 회개할 줄 아는.
그런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입술로만 섬기고. 마음으로만 공경하는.
그런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정말 삶으로 공경하고. 삶의 예배를 맺는.
그런 내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사랑하는 형제 자매를 향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과 그분의 뜻을 전할 수 있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란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 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우리 주님 안에 거하며.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그런 하루. 그런 복된 공동체 되길 원하며.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귀한 믿음의 유산을 이어가며. 귀한 믿음의 유산을 증거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복된 하루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하여 드리길 원한다.
(feat. 나의 안에 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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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2:21-34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갈등과 오해를 겪곤 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렇다.
어제 우리가 살펴봤던 것처럼.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강 인근에 제단을 마련한 것 때문에.
이스라엘 10개 지파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몰려들게 되는데.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은. 일촉즉발/위험한 상황 가운데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본문. 여호수아 22장 12절을 보면. 성경이 이렇게 얘기하죠.
"이스라엘 자손이 이 소식을 듣고.
회중이 실로에 모여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그만큼 이스라엘은 심각한 어려움/위기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재밌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숙한 태도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1) 먼저. 비느하스를 비롯한. 이스라엘 대표단의 모습이 그렇다.
그들은 분명.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제단을 쌓았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며. 분노하며 그 길을 달려갔는데.
막상 그 자리에 도착해서는. 신중하게/겸손하게 반응을 한다.
오늘 본문 16절 말씀이 그렇다.
그들이 길르앗 땅에 이르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서 돌아서고.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거역하고자 하느냐?"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들을 향한. 판단과 정죄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형제자매를 향한. 판단과 정죄의 마음으로 하였다면.
그들은 자초지정을 묻고. 뜻을 묻지 않았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 바로 칼날을 들이대고. 목숨을 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그들이 겪었던 아픔과 상처를 돌이키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 그와 같은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여호수아 22장 17절을 보면.
"브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며.
오늘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받지 못했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이와 같은 잘못을 범하느냐?"고 다독이며.
오늘 너희의 삶이. "아간과 같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2) 그랬더니 이 얘기를 듣는.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지파가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가 이와 같이 제단을 쌓은 것은.
우리의 뜻을 돌이켜 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려 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백성되기 위한 길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혹시라도 훗날. 우리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멀어졌을 때.
오늘 우리의 삶이. 서로에 대해 아무런 상관이 없고 무관심해졌을 때를 대비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상기하기 위해.
그래서 제단을 지었음을 얘기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다른 어떤 뜻과. 다른 목적이 없음을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다.
3) 그랬더니 이 얘기를 듣는. 이스라엘 10개 지파의 사람들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그들의 뜻을 받아들인다.
그들의 얘기가 통했던 것이다.
그들의 진심이 전달된 것이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을 향한 바른 지식이 없어서.
때로는 오해를 쌓고 원망이 섞인 일들을 하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서로를 향한 마음/진심을 받아들이고.
서로 헤아려주고. 서로 용납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넘기고.
서로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각자 자기의 일들을 하게 되는데…
이 일은 이스라엘 가운데. 서로를 더욱 신뢰하고. 믿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비가 온 다음에. 땅이 더욱 단단해지는 것처럼.
오늘 이스라엘이. 위기와 어려움의 순간을 넘기고 난 다음에.
그들의 관계가 더욱 단단해지고. 돈돈해지게 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같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크고 작은 오해가 쌓이고. 형성되기 마련인데.
오늘 우리 공동체는.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결하고 있을까?
혹시 오늘 우리는. 이 어려움들을.
수면 아래로 밀어놓고.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관계라는 것은. '긁어 부르럼'이니까.
괜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이스하게. 괜찮은 척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측면에선. 그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이 항상 좋고. 옳은 것만은 아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처럼.
오늘 우리의 관계가. 서로 안에서.
아무런 관심도 없고. 냉랭하게 흘러갈 때.
오늘 우리는. 살아있는 관계/살아있는 공동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관계/죽은 공동체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 가운데. 죽은 관계/냉랭한 관계/오해와 얼룩으로 점철된 관계가 있다면.
오늘 주께서 우리 가운데. 당신의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시면 좋겠다.
오늘 우리가. 형제자매의 마음을 듣고. 그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생각과 뜻을 전하는데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형제 자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의 얘기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내 마음을 찌른다 하더라도.
겸손히 그 얘기를 듣고. 반응할 수 있는.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 되면 좋겠고.
상대방에게 탓을 돌리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YOU Message / 너 때문에…" 라고 말하지 않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의 마음을 성숙하게 표현하고.
상대방에게 우리의 마음/진심을 전달하는.
"I Message / 나의 언어"로 반응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이 땅을 떠나기 전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이 살아있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넘치는.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 공동체가. 위기와 어려움의 순간을 넘어서서.
서로를 더욱 돈독히 세우며. 서로를 더욱 돈독히 사랑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임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워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 가운데.
서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진실한 마음과.
서로의 얘기를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진실한 귀와.
서로의 처지와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진실한 눈과. 진실한 은혜 부어주시길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주님 앞에. 겸손히 의탁하여 드리길 원한다.
(feat.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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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2:10-20
오늘 본문 앞부분을 보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를 집으로 돌려보는 장면을 기록하고 잇다.
이스라엘이 땅을 얻기까지.
이들이 전투 가운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오늘 그 약속이 이뤄졌으니.
이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는. 이런 당부를 덧붙인다.
"너희가 오래도록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그 책임을 지킨 것처럼.
앞으로도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하며. 그 말씀을 지키고. 그 뜻 가운데 행하라(수 22:2-5)"고 말이다.
이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아멘하며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이들 세 지파가. 요단 강가에 이르고 난 다음에.
거기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얘기를 듣고 나면. 언뜻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면 좋은 거 아닌가?
아브라함도 길을 떠나고 자리를 잡을 때마다. 거기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고.
야곱도 아버지 이삭의 집을 떠나는 길에. 벧엘에 제단을 쌓고 거기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 세 지파가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일이 아닐까?"
우리가 언뜻 생각하면.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은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율법을 주시면서.
<단일 중앙 성소>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명기 12장 13절과 14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 한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 그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신 12:13-14)"
이것은 이스라엘 가운데 혼잡한 신앙이 틈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개나 소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무질서하게 나아가지 않기 위해서.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우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도맡게 하였으며.
그렇게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길 원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난 다음에. 길갈에 성소를 마련하였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난 다음에는.
실로에 그 성소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오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강가에 제단을 쌓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라고 얘기하는데.
그만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 일이 심각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우리가 방금 전에. 그렇게 분명히 얘기했었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서류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그 약속을 뒤집을 수 있냐?"고 반문하며.
"오늘 이스라엘 가운데 악이 틈타지 못하도록.
이번 기회에 혼쭐을 내고. 본보기를 보여주자"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의 삶에.
<바른 지식>과 <바른 앎>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실제로 호세아 4장 6절을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라고 얘기하는데.
이 얘기를 듣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이 얼마나 반문했을까?
"우리가 언제 주님을 섬기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언제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오늘도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섬기고 있는데.
어째서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섬기지 않다고. 당신을 욕되게 한다고 합니까?" 라고 반문할 때.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행동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너희가 잘못된 방향으로. 잘못된 섬김을 하고 있는데.
어찌 그것이 나에게 기쁨이 되고. 나에게 즐거움이 되겠느냐.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내 백성이. 나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그래서 망한다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너희가 오늘 나를 섬기는. 번짓수와 방향이 잘못 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어쩌면 오늘 우리의 삶도.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몰라. 그 뜻을 왜곡시키고 변질시켰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그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오늘 아침 말씀을 보는데.
오늘 우리 삶에. 하나님을 향한 바른 앎과. 바른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오늘 우리의 열심과 방향은.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기쁜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아니면 나혼자 만족하고 나혼자 기뻐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을까?
바라기는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선한 열심을 품으며. 바른 길을 걸아가는.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주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깨달음을 얻게 하시는.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런 복을 허락하여 주시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주님을 욕되게 하고. 주님을 욕먹이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내 백성이 나를 떠나. 돌아섰지만.
내 사랑이 내 백성은. 포기 못하니.
내 모든 것 내어주고. 나 그들을 얻으리라.
여호와께 돌아가자. 우린 돌아서도 그는 변치 않네.
여호와께 돌아가자. 우린 넘어져도 그 사랑 영원하네"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바른 깨달음과. 주를 향한 바른 지식 더해주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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