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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9 :: 2020.08.19(수) 습 1:14-2:3
- 2020.08.18 :: 2020.08.18(화) 습 1:1-13
습 1:14-2:3
주님의 날이 다가온다. 그날은 무서운 날이다.
용사가 기운을 잃고 부르짖으며.
환난과 고통 가운데 사람들이 힘겨워하며.
캄캄한 흑암과 먹구름이 온 세상을 뒤덮을 것이다.
견고해 보이던 성읍이 무너지고.
공의와 정의가 흘러야 할 곳에. 사람들의 피가 둥둥 떠나니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스바냐는 그날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그 날이 다가온다. 득달같이 다가온다.
주님의 불 같은 질투가 온 땅을 활활 태울 것이다(습 1:18)"
그날에.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은과 금'으로는 구원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백해무익하다.
도리어. '돈'으로 주님의 마음을 얻으려 했다가는. 큰 코 다칠 것이다.
우리 주님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무엇을 구해야 할까?
다만.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할 따름이다.
실제로 스바냐 선지자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여러분이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창피한 줄 아십니까.
부끄러워 낯짝을 들 수가 없습니다.ㅠ
하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를 구하오니.
여러분. 창피함을 무릅쓰고. 주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함께 모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을 찾으십시오.
바르게 사십시오. 겸손하게 사십시오.
그러면. '행여나' 주님의 날에. 화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행여나...' 오늘 아침 이 말씀에 계속 눈길이 머문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까닭은.
'행여나'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간구하는 마음 때문이다.
다윗의 기도가 한 예이다.
그는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를 범한 다음 하나님 앞에 큰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치는 일이었다.
다윗은 아이를 위해. 식음을 전폐하고. 7일 동안 기도의 자리에 들어선다.
일어나지도 않고, 맨 바닥에 누워서 잠을 잤다.
하지만. 아이는 결국 죽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다윗이 기도를 멈추고. 왕궁으로 돌아와 음식을 먹는다.
이 때 신하들이 이렇게 묻는다.
"왕이시여. 왕자가 살아계실 때에는.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시더니.
어찌 왕자가 돌아가시자. 이제 음식을 드십니까?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에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 내가 금식하면서 운 것은.
'혹시'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 아이를 살려 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아이가 죽게 되었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계속 금식하겠소?
나는 그에게로 갈 수 있지만. 그는 나에게로 돌아올 수 없소(삼하 12:22-23)"
다윗이 뭐라고 말하는가? '혹시!'
혹시라도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신다면.
혹시라도 우리 아들이 다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소망/바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이것이 기도다.
기도는. 기계적인 반응/결과로 이뤄지지 않는다.
기도는. '혹시나 / 행여라도'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을까 하는.
갈망과 소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알고. 주께로 돌아감을 알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주님이 우리의 기도에 '무조건' 반응하시리라 생각하는 것은 over다.
우리는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하며.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길'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혹시라도 긍휼히 여겨주시지 않을까'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행여라도 긍휼히 여겨 주시지 않을까' 바라며.
한 마음과 한 뜻으로 간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도 오늘. 주님 앞에 당신의 자비를 간구하며 기도의 자리에 나아간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의 백성이 다 겸비하여 기도하면
나의 얼굴을 구하여서 그 악한 길 떠나면.
하늘에서 듣고. 우리의 죄를 사하며.
이땅을 다시 회복시켜 주겠다 하셨으니(대하 7:14)
우리가 이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혹시라도/행여라도'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할 수 있다면.
이제는 우리가 새 사람. 새 백성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렇게 기도하는 것 조차. 너무 창피하고 부끄럽습니다.
'다음엔 잘 하겠다'고 매번 약속을 하지만.
매번 같은 문제로 넘어지고 쓰러지는 우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 앞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조차. 사실은 민망하고 부끄럽습니다.ㅠ
하지만. 주님. 우리가 주님 외에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주님 말고. 다른 어디서 평안을 찾으며.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안면몰수하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당신 앞에 엎드립니다.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의 얼굴을 다시 우리에게 비춰주시며.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강같이 흘러 주옵소서."
그렇게.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하며. 오늘 하루를 주님께 의탁한다.
우리 주님은. 자비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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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 1:1-13
주님이 오신다.
이스라엘은 반갑게 그를 맞이하려 하지만. 그분의 얼굴 표정이 심상치 않다.
인자한 웃음이 아니라. 잔뜩 입술을 깨물고 계신다.
그리고. 한 손에는 채찍을 들고. 엄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여호와의 뜰을 황폐하게 만들었도다."
"내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말끔히 쓸어 없애겠다."
"사람도. 짐승도. 공중의 새도. 바다의 고기도.
남을 넘어뜨리는 자들과 악한 자들을. 거꾸러 뜨리며.
땅 위에서 사람의 씨를 말리겠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화가 나신 걸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불의와 부정 때문이다.
그들은. 바알 신전을. 이스라엘 안으로 들이고.
이방 제사장(그마림)을. 그들 가운데 두었다.
일월성신을 섬길 뿐만 아니라. 밀곰을 섬기기도 하였다.
하나님이 그들 곁에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등을 돌리고. 다른 이방신들에게 절을 할 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빡칠' 수밖에.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화를 발하신다.
단지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다.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시며. 선지자들을 통해 숱하게 경고했지만.
듣고도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의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도 '꼭지'가 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날이 오면".
엄중하게 이스라엘을 꾸짖고 책망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그 날이 오면" 만사형통 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날이 오면" 너희 안에. 곡소리가 가득할 것이라 경고하신다.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바라보시며. 느끼신 마음과 같다.
실제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뭐라 말씀하셨던가?
그는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과 멸망을 바라보며. '슬피 울며' 통곡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장사꾼의 소굴이 된. 성전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독사의 자식들아. 야이 XXX야..."
그는 한참동안. 욕지거리를 하신 다음. 성전을 뒤집어 엎으신다.
주님의 '거룩한 분노'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분노/예수님의 분노에 감정이 이입된다.
요즘 나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전광훈으로 비롯된 일련의 사건 때문에. 마음이 너무 힘들다.
목사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 부끄럽다.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하지만. 더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교계 어느 누구도. '책임있게' 나서지 않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로서.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애통함과 통애함으로.
자기 옷을 찢고. 자기 몸을 찢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여전히.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 모습에. 마음이 답답하다.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실까?
그래서. 11절에 나오는 말씀이. 나를 소리치게 한다.
"너희는 슬피 울어라"
이 말씀이. 나를 붙들게 한다.
지금은. 슬피 울며. 기도할 때이구나.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선지자들이 슬피 울며. 주님을 마주하였던 것처럼.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슬피 울며. 하나님을 마주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이 땅의 죄와 슬픔을 부여잡고. 하나님 앞에. 엉엉 울어야 할 때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을 찢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마음을 찢으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때로는. '소리 내어' 엉엉 울며.
때로는. '소리를 삼키며' 꺼억꺼억 운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길 바랄 뿐이다...ㅠ
(feat. 열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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