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6:47-56
'말고'
그는. 대제사장의 종으로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거기 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어떻게든. 대제사장의 눈에 들기 원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 소탕 작전"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즉각적으로 행동하였다.
그래서. 예수를 잡으러 갈 때에. 맨 앞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했을 것이고.
가룟 유다가. 예수께 입을 맞출 때에도.
"아~ 이놈이구나!" 하면서. 즉각적으로/즉시로. 예수님을 붙잡았을 것이다.
근데. 그 순간 갑자기. 칼이 날아온다.
예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베드로가 즉시로 칼을 휘둘렀고.
이 칼은. 그 즉시. 말고의 귀를 자르게 된 것이다.
이에. 말고는. 아픈 귀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아! 내 귀…"
순간. 겟세마네 동산은.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를 잡으려는 사람들과.
그들을 막으려는 사람들과.
피 흘리며 소리치는 사람과.
여러 사람이 엉키고. 또 엉켜서. 그야말로. 난리 블루스가 되었을 것이다.
이때. 우리 주님이. 그 곳을. 고요히/잠잠케 하신다.
베드로의 손을 붙잡고. 칼을 집어 넣으라고 말씀하시고.
피흘리는 말고의 손을 붙잡고. 그의 귀를 고쳐주시며. 그에게 친절하게 말씀하신다.
당신을 잡으러 온 군대를 향해서도. "왜 이렇게 난리를 치느냐?"고 조용히 타이르시고.
"내 순순히. 조용히 당신들을 따라가겠다"고 말씀하시며.
십자가의 길/죽음의 길을. 고요히. 잠잠히 받아들이신다.
이 일을 겪으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말고는. 원수를 은혜로 갚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로마 군대는. 자기들이 보는 눈 앞에서.
예수가. 말고의 귀를 고치시는 장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정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의 행동을 보며. 그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아야 하는 게 사실이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원수를 은혜로 갚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 시끄럽고. 정신 없는 상황 속에서.
사람을 돌보고. 그를 살핀단 말인가?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의술/의학의 도움도 없이.
아픈 사람의 귀를 고칠 수 있으며?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큰 힘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조용히. 아무런 반항과 저항도 하지 않고.
군대에게 잡혀가고. 그에게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측면에서. 예수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온통 물음/질문을 남기기에 충분하였다.
"이분은 대체. 왜 누구시길래.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거기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의 행동을 보고. 그에게 질문을 하고. 그를 따라가기 보다는.
그냥 자기가 하던 대로. 관성대로 행동하고. 관성대로 살아갔었다.
실제로. 초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요하네스 크리소스톰은. 말고의 행적을 가리켜. 이와 같이 말한다.
"말고는. 자신을 용서하고 치료해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제사장을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제 곧 죽을 사람이고.
대제사장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물쭈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대제사장의 집에서. 예수님께 침을 뱉고 그를 고문했으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무리 가운데 들어가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던 사람도 말고이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 때. 뒤에서 욕을 했던 사람도 말고입니다"
물론. 크리소스톰의 이 증언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정확한 역사 자료도 아니고.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역사적인 증거/다른 객관적인 증거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 또한 마냥 허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대제사장과 로마 군대는. 계속해서 예수를 증오하고.
그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말을 일삼았으며.
백부장은.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며. 회개하고 돌이키고. 주님께 돌아왔다는 기록은 있지만.
말고는. 신약 성경에. 일절 그랬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말고와. 예수를 잡으러 왔던 사람들은.
예수의 능력. 그분의 신적 능력/신적 현현을 경험하고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회개와 돌이킴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의 눈에 들고. 그 사람의 마음에 합당한 대로 행하며 살아간 것이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인가.
근데. 참 재밌는 것은. 우리 주님이. 그 사람들을 향해서.
증오하고. 멸시하고. 비방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긍휼히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와 같이 기도하신다.
"주님. 저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의 모습을 함께 돌아본다.
오늘 우리는.
자비를 베푸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 앞에서.
돌이키고. 엎드리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이 아니라. 이 땅을 쥐고 흔드는. 세상의 임금/돈이라 생각하는가?
나는. 내게 반역하고. 저항하는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처럼. 힘과 권력으로. 맞서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을 향한 사랑과 자비로. 그들을 품어주고 있는가?
말고는. 은혜를 원수로 갚으며. 선을 악으로 갚을 때에.
우리 주님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그를 품고 용납해 주시는데.
오늘 우리는. 말고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우리 주님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가?
짧은 말씀이지만.
오늘 아침. 참 여러 생각과 기도를 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 이 말씀을 쉽게 내려놓지 못할 것 같다.
오늘 하루. 이 말씀을 계속 곱씹고 묵상해야 할 것 같고.
이 말씀이. 오늘 우리 삶에. 정말 힘이 되고. 소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특별히 이제 조금 있으면. 성탄이 찾아오는데.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찾아오신 목적과 소망이 무엇인지.
우리가 깊이 이해하고. 묵상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고.
그 주님이. 오늘 우리 삶 가운데. 살아 숨쉬고. 살아 역사하는.
그런 내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가 되면 좋겠다.
그렇기에. 이 시간.
이 찬양의 고백을 드리며.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가길 소원한다.
"잊을 수 없네. 하나님의 사랑. 날 살리려고. 주신 생명.
내 십자가 지고. 오르신 갈보리 언덕. 날 향한 사랑 때문에.
우리 때문에 생명 주셨고. 우리 때문에 고통 당하셨네.
우리 때문에. 갈보리 오르셨네. 무지한 우리 때문에."
오늘 하루. 그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 삶 가운데. 온전히 흘러넘치길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우리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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