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1:1-14
창세기를 보면.
인간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역사가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장자’가 아닌.’
차자’가 약속의 유업/기업의 승계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삭이 두 명의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누구에게 장자권이 돌아가게 되는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다.
고대 근동의 풍습에서는.
장자에게 두 몫을 주고. 그에게 유업을 주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하나님은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하셨다.
야곱이 에서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다.
도찐개찐이다.
에서가 그 당시. 이방 여자를 사랑하고. 약속의 계명을 업신여긴 것도 맞지만.
야곱도 하나님 앞에서 달리 자랑할 것이 없었다.
그는 속임수와 거짓의 명수였으며.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나이스하게 보였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의 속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니. 야곱이 에서보다 낫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야곱이 하나님의 택하심/선택을 받은 것은.
전적인 주의 은혜 때문이었다.
주의 은혜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며.
주의 은혜 때문에. 여기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시내산에서 당신과 언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이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었던가.
그는. 반역과 불평 불만의 명수였으며.
끊임없이 문제제기 하고. 끊임없이 주를 떠나기 바빴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보다 죄를 더 적게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다른 나라는. 몰라서 죄를 지었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약속의 말씀을 알고도 죄를 지었다.
그러니 그들의 죄가 어찌 가볍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또 범죄하였으며.
하나님을 떠나고 또 멀리 떠났다.
하지만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당신의 사랑으로. 여기까지 그들을 인도해 오셨다.
당신의 사랑. 당신의 변치 않는 그 자비가.
이스라엘을 붙들어 주고. 여기까지 그들을 인도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역정을 부리고. 소리치는 장면을 우리는 보게 된다.
실제로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는 우리 주님의 말씀에.
“당신이 언제 우리를 사랑했냐?”며 역정을 내고.
6절에.
“내가 어떻게 나를 이렇게 무시하고. 함부러 대할 수 있냐?”는 우리 주님의 말씀에.
“내가 언제 당신한테 함부로 대하고. 무시했냐”고.
소리치고 항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정말 가관이다.
한번쯤은 자기의 모습을 돌아보며.
“내가 언제 그랬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하며.
정중히 물어볼 법도 한데.
한번도 그러지 않고. 한번도 자기 주장을 멈추지 않는다.
정말 싸가지가 바가지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을 하나 하나 낱낱이 들춰내시는데.
그 얘기를 듣는 우리가 다 민망해 지는 것 같다.
“더러운 빵을 바치고. 아무렇게나 음식을 차려도 된다고 생각하고.
눈먼 짐승과 절뚝거리는 병든 짐승을 바치면서도”
하나님 앞에 아무런 죄책감도 없고. 민망함도 없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얼마나 수치스럽게 느껴지는지.
그래 놓고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복이나 달라”고 소리치고 있다(9절).
정말 가관이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 주님이.
어쩔 수 없이. 저 성문을 닫았으면 좋겠다(10절)고 하고.
아무도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10절)고 하시는데.
그 주님의 마음이. 정말 처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까.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겨우면.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렇게 소리 치시는 걸까.
주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과 당신의 관계가. 이대로 악화되길 원치 않으셨고.
그렇기에 주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경고하시고. 그들이 주께 돌아오기를 간곡히 요청하고 계셨다.
이것이 말라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마음. 그의 기본적인 생각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의 삶을 함께 돌아보게 된다.
주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셨는데.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
그 은혜를 생각하며. ‘당연한 것으로. 마땅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에 감격하며’
오늘도 주를 따르고. 주께 더 가까이 가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고. 만홀히 여기는. 그런 공동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며. 그분을 기뻐하고 노래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고.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를 내 앞에 항상 모셨다(시 16:8)”고 하였던 것처럼.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도.
전심으로/진심으로 주를 경외하는 그런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런 막힘도 없고. 아무런 걸림돌도 없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고.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내가 누려 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 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은혜를 만끽하며. 은혜를 고백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의 삶을. 겸손히 주께 의탁하길 원한다.
(feat. 내가 누려 왔던 모든 것들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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