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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21 :: 2025.02.22(토) 눅 6:1-11
눅 6:1-11
어떤 분이 말하기를.
"아무리 좋은 운동(movement)도. 50년이 지나면 그 생명력을 잃고 도태된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좋은 목적으로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변질되고 고집스러워지기 마련인데.
그렇기 때문에 외부의 유입과. 내부의 갱신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 자체로 고인물이 되어서.
그것이 하나의 아집이 되고. 그것이 하나의 우상이 된다는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모습이 그랬다.
신구약 중간기를 보면.
이스라엘이 율법의 정신을 잊고. 율법을 망각하며 지낼 때.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새로운 움직임/숨결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바리새파-구별된 사람들"이라 불렀다.
그만큼 바리새파 사람들의 등장은.
이스라엘 안에 커다란 영향력을 주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들은 변질되고 도태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율법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계명을 기억하는 것보다.
자기들이 만든 율법 지침을 지키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
그들 인생 최고의 목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율법 조항을 보면.
수많은 율법 조항/조문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말들이 기록되어 있다.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아라.
안식일에는 일정한 거리 이상을 걷지 말아라.
안식일에는 불을 피워서도 안 되고.
안식일에는 뭐 해야 하고…" 이런 규정들이 쭉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글들을 읽다보면. 우리가 자유함을 얻는 게 아니라. 억압/구속 받는 것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율법의 조문이. 우리를 '마이크로 컨트롤'
너무 미세하게 조종하고. 너무 미세하게 괴롭히기 때문이다.
분명 주께서 우리 가운데 말씀을 주실 때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가 풍성함을 얻기 위해서.
그래서 말씀을 주셨는데.
오늘 이 말씀이. 우리를 제단하고. 우리를 얽어매니까.
마치 우리가. '마리오네트 인형'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 춤을 추고 있고.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그 가운데 생기가 하나도 없고. 기쁨도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렇다.
예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밀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을 가지고.
"왜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냐"며 비아냥거리고.
어떻게든 예수의 행동을 책잡고. 그를 못살게 굴려는 모습을 보니.
그들이 정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마음이 있는지.
진지하게 되물어보게 된다.
그래서 오늘 주님이.
일부러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고. 그를 낫게 하시는데.
이것은 우리 주님이. 일부러 그들의 올무에 뛰어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도 못되먹어서.
그들의 잘못을 꾸짖고.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고.
이 일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지체들을 사랑하길 원하셨다.
그래서. 손마른 사람을 데려다가.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들 앞에서. 이 사람을 낫게 하시는데…
나는 오늘 이 땅 가운데도. 이와 같은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
실제로 종교개혁을 시행한지 어느덧 600년이 지났고.
그렇게 오늘 우리 교회는. 새로운 변화/새로운 도전을 맞게 되었다.
많은 교회들마다. 다음세대를 살려야 한다는 캐치 프레이즈를 걸고 있고.
이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 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실천하고. 실행하는 교회는 드물다.
아무리 좋은 생각/의견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의 지난 역사/전통과 부딪히면. 우리는 그 꿈을 내려놓아야 되고.
각 부서나 기관에서. 새로운 도전/새로운 의미있는 활동을 하려면.
당회나 중직자들의 허락을 맡고. 그들의 승락을 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그 사이에 에너지가 뺏기고. 힘을 잃게 되는 경우가 나타난다.
탁상공론하는 경우도 많다.
현장에서는. 이런 필요가 있는데. 위에서는 그런 필요를 읽지 못하고.
현장에서는 이런 대처/이런 움직임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윗 사람들을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마치. '중증외상센터'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다.
현장에서는… 중증외상센터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1분 1초를 다투는. 급박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데.
위에서는. 금전적인 이유로. 또 자기에게 유리한 입장/결정을 하기 위해서.
정치 싸움을 하고. 뺑뺑이 돌리다가.
결국 골든타임을 놓치고. 목숨을 잃게 되는데.
어쩌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이. 그런 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생각보다 세게 현타가 올 때도 있다.
"다음세대를 살리겠다"는 말이. 그냥 탁상공론/허언이 되면 안 될텐데…
"다음세대를 살리겠다"는 말을. 차라리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것조차도. 우리의 의를 쌓고. 우리의 의를 내세우는 일이 되면 안 될 텐데.
왜 우리는 입으로는 다음 세대를 살려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왜 아무도 실질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는 걸까?
어쩌면. 아무도 대응책을 내놓지 않는 게 아니라.
어차리 생각/계획을 내놓아도. 위에서 들어주지 않을 게 뻔하니까.
이제 아무도 생각을 내놓지 않고. 그냥 개입하지 않기로.
포기하고 물러서는 것은 아닐까?
여러 생각과 고민이 스쳐간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기도할 따름이다.
우리 주님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 가운데. 갱신과 새로움의 움직임이 일어나길 소망하며.
오늘 우리가. 율법의 전통과. 율법의 형식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서.
오늘 우리 가운데 율법의 정신이 되살아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손 마른자처럼.
오늘 우리 인생이 경직되고 메마른.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고. 하나님의 자유가 임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이 아침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이 찬양의 고백을 드리길 원한다.
"오 나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왕이라.
오 나의 하나님은 평강의 왕이라.
오 신실하신 사랑 영원히 변치 않네.
오 영원하신 이름 그 이름 찬양해.
앞을 볼 수 없는 일어설 수도 없는.
어두웠던 삶도 그가 다시 일으키시네.
돌아갈 수 없는 바라볼 수도 없는.
실패했던 삶도 그가 다시 세워주시네.
오 나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왕이라.
오 나의 하나님은 평강의 왕이라.
오 신실하신 사랑 영원히 변치 않네.
오 영원하신 이름 그 이름 찬양해.
오 나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왕이라.
오 나의 하나님은 평강의 왕이라.
오 신실하신 사랑 영원히 변치 않네.
오 영원하신 이름 그 이름 찬양해.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 가운데.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시고. 오늘 우리 영혼을 자유케하며. 회복케 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하루되게 하여 주시길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 하루의 삶을.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오 나의 하나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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