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20:1-17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참 크고 깊은 것 같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야기만 봐도 그런 것 같다.
실제로. 레위 사람이. 아내의 죽음을 맞이한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말이 무엇인가?
"<이 사람들이> 나를 죽이고 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다가.
나 대신에. <우리 아내>를 죽였다는 것이며.
그래서. 내가 너무 <의분에 차서> 이스라엘을 소집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가운데. 이처럼 음란하고.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함께 대책을 마련하고. 함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레위 사람은. 정말 정의의 사도인 것 같다.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공의와 정의를 사모하며.
불의에 항거하며. 끝까지 싸우고 투쟁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율법의 사람말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속을 들여다 보면.
우리는. 이 사람이. 그리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왜냐면. 이 아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에는.
이 남편의 책임/지분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브아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와 해하려 한 것은 맞지만.
이 아내를 그들에게 넘겨준 사람이 누구였는가?
"자기 자신"이었다.
자기가 해코지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그 사람들에게 넘겨줬었고.
그것 때문에. 자기 아내가 해를 당하고 죽게 되었다.
심지어.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것처럼.
이 남편은. 아내를 궁지에 몰아놓고도. 잠만 쿨쿨 자고 있지 않았던가.
정말 아내를 사랑했다면. 정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면.
아내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밤잠을 설치고. 노심초사 기다려야 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이 사람에게서.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순 없었다.
오히려. 자기 아내를 넘겨 주고 난 다음에.
그는 자기 혼자 잠만 쿨쿨 자고 있었고.
아내가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요청할 때도.
아무런 소리도 듣지도 않고.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근데 이제 와서. 아내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고?
그러면서도.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하나도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기브아 사람들만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다고?
참 비겁하고. 어이가 없는 행동이다.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 것은.
기브아 사람. 베냐민 지파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찾아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책임을 묻고. 따질 때.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우리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냐?"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데는.
아마도 기브아 사람들의. 말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왜냐면. 레위 사람이.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사실을 왜곡/편집했듯이.
기브아 사람들도.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사실을 왜곡/편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자기들 안에 있는 잘못과 허물을 돌아보는 것보다.
제 식구를 감싸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내 새끼가 뭐 그리 잘못했냐?"고.
핏대를 올리며. 바락바락 대들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일 때문에.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서. 내전/전면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업/땅을 얻기 위해. 애를 써도 모자랄 판에.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며. 허튼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근데. 이 모습이. 너무 애달프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오늘 이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공동체에 있었던 일을 되돌아 보면.
사실 이와 같은 모습이지 않았을까?
오픈된 공간에서. 세세한 얘기를 할 수는 없지만.
서로 갈라지고. 토라지고. 싸우는 모습.
오늘 우리는. 언제쯤 서로 하나되고.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만약>이라는 말을 계속 되짚어보게 된다.
<만약> 우리가. 자기의 잘못을 겸손히 돌아보고 인정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있었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
나에게 유리한 대로. 상황을 재해석하고.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잘못을 받아들이고 용납했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
무조건적인 용납과 포용이 아니라.
제 식구를 감싸는 일에는. 열을 낼 것이 아니라.
정말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통애하였다면.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그렇게 겸손히 반응하고. 돌이킬 줄 알았다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까지 아프고. 고통당하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왜 그랬을까?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마음이 참 많이 아리고. 아프게 느껴지는 것 같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스라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오늘 우리도. 이와 같은 아픔과 고통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아가. 당신의 자비와 은혜를 구한다.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 중심적이며.
모든 것을 나에게 유리한대로. 해석 적용하며.
나의 의로움을 주장하기 위해. 사람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결국 이것 때문에. 공동체 안에 다툼과 분열이 생겨나며. 진실 공방으로 번져가는.
그런 일이 우리 안에 그치길 소원하며.
정말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와 인애가 통치하는.
그런 주의 공동체. 그런 주의 나라 되길 소원한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어야 할 곳은.
다른 어느 곳보다.
바로 오늘 우리 자신이다.
(feat. 주의 나라가 임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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