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1:1-11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
이것은. 개선장군의 모습을 빗댄 것이다.
그당시 전쟁을 마친 사람들이. 승리의 함성을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던 것처럼.
우리 주님도. 그와 같은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당당히 들어오고 계신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에. 수많은 사람이. 예수의 행렬을 보고. 놀랐다.
이런 환호와 함성을. 한번도 들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군가 싶고.
앞으로 이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될까 싶었다.
혁명이란 것은. 아무도 몰래. 조용히/은밀히 진행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야단법석/소란을 피우면서. 예루살렘에 들어오다니.
그의 모습이. 참 신기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근데. 오늘 말씀을 보면서. 내 마음에 유독 들어오는 한 구절은.
5절에 기록된. <멍에 메는 짐승>이라는 표현이다.

실제로 5절을 보면.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굳이 여기서. <멍에 메는 짐승>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나귀> 하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데.
여기서 굳이. <멍에 메는 짐승>이라는 말을 덧붙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면서.
"이것은 선지자(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덧붙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참 이상하고. 신기하다.


그래서. 복음서에. "멍에"라는 말을. 똑같이 검색해 봤더니.
오늘 본문 말고. 딱 한 군데서만. "멍에"라는 말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게 어디냐면? 마태복음 11장 29-30절 말씀인데.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이 이렇게 기록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근데. 이렇게 보니.
마태복음 11장 29절과. 오늘 본문 5절 말씀이. 너무 유사한 형태로 되어 있다.
온유함(마 11:29). 온유함(마 21:5).
겸손함(마 11:29).
멍에(마 11:29). 멍에(마 21:5).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멍에 메는 짐승의 모습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인생의 짐과 무게들을. 당신이 손수 거둬주시고.

2) 우리 주님이. 십자가의 고통과 짐들을 감당하시면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3) 아무런 죄도 없으시고. 아무런 잘못도 없으신 주님이.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통치할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등에 업고.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것처럼.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가.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통치할 것을 바라보며.
우리 주님을 등에 업고.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의 모습 속에서.
오늘 우리 주님의 모습이. 정확히 오버랩/겹쳐 보인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사.
우리를 위해. 당신의 십자가/멍에를 짊어지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 말이다.

그리고. 그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십자가의 멍에를 지고. 하나님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또.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가.
당신의 멍에/십자가를 지고. 이 길을 걸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 주님이.
십자가/멍에를 지고. 당신을 따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고대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멍에가 무엇일까 되돌아 본다.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오늘 내가 감당하고. 책임져야 할 일은 무엇일까?

때때로 이 멍에/짐을 지는 것이. 참 쉽지 않고. 고달픈 일이지만.
우리 주님이.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당신의 십자가/멍에를. 기쁨으로 짊어지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주님 앞에서.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그와 같은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온 도시가 떠들석하며. "이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어볼 때.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가리켜. "이는 나사렛에서 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시요"라고 말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 되면 좋겠고.

오늘 우리를 향해. "이 사람이 대체 누구냐?"라고 물어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당신의 백성. 당신의 자녀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우리가 되면 좋겠다.

오늘 하루. 그 주님의 자비하심과 은혜가.
오늘 우리 가운데. 온전히 흘러넘치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만 왕의 왕 내 주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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