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1:1-7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이시로다. (아멘)"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며. 처음으로 하는 말이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가. 어떤 어려움과 정황 속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들 가운데. 큰 어려움과 고통이 있었던 것 같다.
시대적으로는. 로마 황제의 핍박과 고문아래. 성도들이 큰 어려움/박해를 겪었던 것 같고.
사회적으로는. 교회의 분열과 깨어짐 속에. 많은 성도들이 아파하고. 고통을 겪었던 것 같다.
실제로 고린도전서를 보면. 고린도 교회 안에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 일들로 인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물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게 교횐가? 이게 공동체인가?
왜 우리는. 사랑을 말하면서. 서로 싸우고 다투고 갈라지고 있단 말인가?
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사분오열. 제각각 찢어지고. 각자도생하고 있단 말인가.
왜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말하면서.
우리 안에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일들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성도들은. 교회의 모습을 보며. 이와 같은 물음/질문을 던졌을 것이며.
하나님을 향해서도. 이와 같은 물음/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현실과 어려움들을 알고 계신가?
분명.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돌보신다고 하셨는데.
그 주님은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지금도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속히 오지 않으시고.
왜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돌아보지 않으시고.
왜. 우리를 구원해 주지 않으신단 말인가."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탄식하며. 절망하고 있었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돌봐주시면 좋겠는데.
그 일이 '지금 당장' 이뤄지지 않고. 그 일이 '지금 당장' 나타나지 않으니.
성도들이. 탄식하며. 절망하며.
슬픔 가운데. 환난 가운데. 주를 부르고.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두번째 편지를 쓰며.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원한다.
그래서. 고린도후서를 시작하며. 사도가 처음으로 하는 말이 무엇인가?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 말이. 얼마나 힘이 있고. 얼마나 격려가 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사도가 겪은 고난과 어려움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린도후서 11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고난 받고. 고통 받았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야기가 참 짠하고. 또 눈물겹다.
40에서. 하나 뺀 매를 맞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니며.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과.
춥고. 배고프고. 교회에 대한 많은 고민과 염려속에서.
사도 바울도. 그의 마음이 많이 약해지고. 또 애탄 적이 많았다고 이야기 한다(고후 11:23-29)
하지만. 사도는. 그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공급을 받았다.
하나님이. 자비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문자로만 경험하고. 문자로만 만난 것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경험하고. 실제 삶으로 만났다.
그리고 이 일을. 사도 곁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지켜봤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도 바울을 위로하고 격려하시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사도 바울을 구원하고. 지켜오셨는지.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그 곁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함께 경험하고. 이 일에 함께 증인이 된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이.
"그는 자비의 하나님이시요. 위로의 하나님이시요.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구원하고. 건지시는 하나님이시요"라는 말을 하니.
이 말이 얼마나 힘이 되고. 또 격려가 되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을 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딱 2가지다.
하나는. 그 자비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 삶을. 구원하고. 건져주시길 바라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 우리 삶을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파하고 고통하고 있는가.
튀르키예. 시리아 지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아파하고. 고통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로. 폭력의 문제로. 또 기타 등등 여러 이유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아파하고. 탄식하며. 절규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참다 참다 못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마지 못해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에게. 어떤 소망과 희망이 있겠는가.
수많은 사람이 아파하고. 또 탄식하며. 절규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성도들의 삶의 형편이다.
그렇기에.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제일 먼저. 처음으로 구하는 것은.
그 자비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 삶을 만져주시고. 구원해 주시길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기도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두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서로 서로의 삶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 본문. 4절에서. 사도가 하는 말이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그는)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이시로다"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주님이 우리를. 사랑의 편지/위로의 편지로 부르신다는 것이다.
사도가. 갖은 위험과 어려움과 핍박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하고.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며. 그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부르심/자리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 가운데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좋겠다.
세상에서도. 참 많은 어려움과 아픔을 겪고 있는데.
왜 우리끼리도. 이렇게 공격적이고. 서로에게 상처를 쏟아내는 말들을 한단 말인가.
우리 안에. 다툼과 분열과. 시비와 원망의 말들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사랑과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 안에. 서로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 마음이 아니라.
서로를 측은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이 두 기도를 할 따름이다.
"주님. 우리가 많이 아픕니다. 주님. 우리를 위로해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가 우리의 아픔에만 매몰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형제자매의 아픔을 돌아보며.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주께서 나와 우리 공동체 모두에게.
주님의 위로와. 주님의 자비를 부어주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성도의 노래)
'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 > 고린도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03.03(금) 고후 1:12-14 (0) | 2023.03.03 |
---|---|
2023.03.02(목) 고후 1:8-11 (0) | 2023.03.02 |
2018.12.14(금) 고후 13:7-10 (0) | 2019.01.07 |
2018.12.13(목) 고후 13:1-6 (0) | 2019.01.07 |
2018.12.12(수) 고후 12:19-21 (0) | 2019.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