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12:1-10
우리는. 흔히 중세 교회사를 가리켜. 암흑의 시대라고 말한다.
초대 교회 안에. 복음의 역사. 부흥의 역사가 있었다면.
중세 교회 안에서는. 이런 것들이 많이 사라지고. 그 생명력을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제도화 되고. 관습화 되기 시작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하였으며.
사제들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처럼.
자기의 힘을 자랑하고.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성경을 읽는 것도. 사제들만 할 수 있었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것도. 사제들을 통해 진행하였으며.
모든 것이. 사제들의 허락을 받고. 사제들의 손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이에. 칼빈과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은.
'만인 제사장설'을 내세우며. 교회를 개혁하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통로/길을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종교 개혁이 가지고 있는 의의. 그 목적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근데. 오늘날 한국 교회를 보면.
어떤 측면에선. 우리가 중세 교회를 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목사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고. 힘이 더해지면서.
목사가. 신격화 되고. 우상시 되는 경향이 오늘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오늘 우리에게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걸까?
나는 그 우선적인 이유가. 목회자들의 교만함과 오만함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만큼. 또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교회가. 목회자를 그렇게 만들고 길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 "오냐오냐" 해주면. 아이들이 머리 끝까지 오른다고 하는데.
어떤 측면에선. 목회자들이 그렇게 타락하고 부패하게 된 것에는.
교회의 책임과 성도의 책임도.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하면서. 그들을 신격화하고. 높이다 보니까.
목사들이. 정말 자기가 훌륭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스스로 올무에 빠지고.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뻑하면. 자기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며.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으시대곤 한다.
성도들의 삶과 고민을 듣기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치고 훈수질 하려고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르기 보다는.
때로는.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경향 또한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마음이 참 안타깝다.
"이분이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을 건데. 왜 이렇게.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나도. 이분처럼. 그렇게 타락하고 변질되진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런 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마음 깊이 안타까움과 탄식의 소리를 쏟아내면서도.
이것을. 나를 향한 경종.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나 역시. 얼마든지 변화되고. 변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오늘 내 마음에 깊은 도전을 주는 것 같다.
실제로. 사도에게 얼마나 많은 영적 은사와 경험이 있었는가?
그는 삼층천에도 여러번 올라가고.
하나님의 신비와 계시에 대해서도. 수차례 듣고. 그것을 경험하였지만.
그는 결코. 이것을 자랑하려고 하거나. 이것을 내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순간.
자기가 스스로를 속이게 되고.
사람들이. 자기를 과대 포장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과대 평가하게 될 것을.
사도는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6-7절).
그래서. 사도는. 자기 안에 있는. 영적 은사와 경험들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안에 있는. 약함과 모남들에 대해서. 더 주목하였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인지를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히 엎드리고.
하나님 앞에. 더욱 진실히 살고자 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도.
사도 바울의 이 권면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진실함으로. 순종함으로 이 길을 따라 나서면 좋겠다.
오늘 나는. 무엇을 자랑하고 있는가?
오늘 나는. 무엇을 내세우고 있는가?
오늘 나는.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 앞에.
스스로를 속이고. 스스로 함정에 빠져들고 있지는 않는가?
바라기는 나와 우리 공동체가.
사람의 칭찬과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공동체 되면 좋겠고.
오늘 우리가. 스스로를 과대 포장하고. 과대 평가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우리 공동체가.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하리라"고 하였던 것처럼.
우리 주님을 높이고. 우리 주님을 자랑하는 공동체 되면 좋겠고.
오늘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그리스도를 향한 순결함이 살아있는.
그런 내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이 찬양의 고백이 내 입가에 계속 맴도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 이 모든 것이 은혜라네.
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 은혜. 은혜라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 이 모든 것이. 은혜라네.
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 은혜. 은혜라네.
내가 가진 것들 중에. 받지 않은 것 하나도 없으니.
오직 주님의 은혜라.
이 은혜를 깨달음도 모두 주님께 있으니.
모든 것이. 주님의 선물.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 이 모든 것이. 은혜라네.
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 은혜. 은혜라네."
오늘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우리 주님의 은혜/선물임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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