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4:13-35

오늘 본문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등장한다.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요.
또 다른 사람의 이름은. '무명'으로 기록하는데.
이들은 평상시. 예수님과 밀접한 관계로 지냈던 것 같다.

아마도 오랫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인 것 같고.
예수님의 제자들과도 허물 없이/서스럼 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줄 알았노라"라고 하는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기대/그들의 소망이었다.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들이. 자기 집/고향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소망을 접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났는데.
이제 우리에게 무슨 소망/기대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얼굴 가득. 슬픈 빛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 돌아가는 길이. 하염없이 멀고 무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근데 재밌는 것은.
오늘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점이. 너무 이상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1) 예수에 대한 소망을 져버렸으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그때 바로 집에 돌아가면 되었을 것을.
이들은 왜 사흘이 지난 지금. 이제서야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까?

2) 더욱이 22-2절을 보면.
그들은.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던 사람들/여자들로부터.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했던 자들 중에(제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두어 사람이. 무덤으로 달려가.
여자들이 말한 것과 같은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들은 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걸까?

예수의 시신이 사라진 것으로 인해. 로마 군병의 심문의 두려웠던 것일까?
아니면. 그곳에 있다가. 예수 귀신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일까?
모르겠다.
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명확한 이유를 성경은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이유를. 오늘 우리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눈이 가리워. 슬픔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절망의 늪이.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
그들은 예수의 소식을 듣고도. 하나도 감사함으로 반응할 수 없었으며.
예수께서 지금 자기 눈 앞에. 그들과 동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 상태로 서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도.
"너희가 길 가면서 주고 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실 때에.
오히려 예수님께 역정을 내고.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어찌 당신만 알지 못하느냐?"고 성을 내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상태였다.


근데.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친히 당신의 말씀을 풀어주기 시작하신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들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을. 예언하지 않았냐(26절)"고 하시며.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자기에 관해 쓴 것을.
모두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하는데(27절)
그러자 그들의 눈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본문 30절과 31절을 보면.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제서야 그인줄 알았다"고 하는데.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유월절 전날/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퍼포먼스/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제서야 예수님이. 우리 주님이신줄 깨닫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25리. 약 10km 이상을 같이 걸어갈 때는.
한번도 깨닫지 못하고. 한번도 반응하지 못하더니.
예수께서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시자.
그제서야 반응하고. 그제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근데 생각해 보면.
오늘 이들의 모습과 오늘 우리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3년 동안 동고동락했지만.
그가 누구신지. 그가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했지만.
그가 누구신지. 그가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
깨닫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던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할 때가 더러 있으며.
예수의 부활이. 오늘 우리 삶과. 무슨 상관/무슨 연관성이 있냐고.
묻고. 따질 때도 더러 있는 것 같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고.
주께서 우리 가운데 말씀을 풀어주시지만.
우리는 마음이 미련하고. 더뎌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반응하지 못할 때도 더러 있으며.

때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오늘 이 땅의 현실과 아픔이 너무 커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주목하지 못할 때도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슬픔 가운데. 탄식 가운데. 절망 가운데 살아갈 때도 더러 있는데.
그런 우리 곁에. 주님이 오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어디까지 가든지. 그 길을 우리와 함께 걷기를 원하시고.
우리에게 말씀을 풀어주시고. 우리의 눈을 밝혀주길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주님을 바라보며.
<사랑의 주님/인애의 주님>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오늘 그 주님이. 오늘 내 삶의 주님. 오늘 내 영혼의 주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디고. 더디고. 어리석고 미련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주께서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심으로.
오늘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밝아지는.
그런 은혜를 주시길 소망하며.

삶에 대한 아무런 소망과 꿈도 없어.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예수님께 돌아가고. 오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그런 우리 인생.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우리의 심령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집을 짓고. 그분과 동행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복된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시고.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하시는.
그런 복된 하루. 그런 복된 우리 공동체 되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 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성령이여.

막혀진 내 귀 여시사. 주님의 귀한 음성을.
이 귀로 밝히 들을 때에. 내 기쁨 한량 없겠네.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귀를 열어주소서. 성령이여"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 가운데.
우리의 눈을 밝혀주시고.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는.
그런 복된 은혜. 그런 복된 삶 되게 하여주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하여 드린다.

(feat. 어두운 내 눈 밝히사)

'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5.04.22(화) 눅 24:36-53  (0) 2025.04.21
2025.04.20(주일) 눅 24:1-12  (0) 2025.04.19
2025.04.19(토) 눅 23:44-56  (0) 2025.04.18
2025.04.18(금) 눅 23:26-43  (0) 2025.04.17
2025.04.17(목) 눅 23:1-15  (0) 2025.04.16
posted by The Sabbat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