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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57-66
아리마대 사람 요셉.
그는 예수의 제자였지만. 유대 사람이 두려워서.
자신의 정체를. 쉽게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많은 사람의 존경과 관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예수의 제자임이 밝혀지면.
그로 인해. 자기에게 어떤 피해와 어려움이 나타날지.
그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오랫동안 은밀히 활동해 왔었다.
그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현 주소였다.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당당히. 예수의 시신을 요구하고. 그를 내어달라고 말한다.
이에 빌라도 이렇게 말한다.
"니가 뭔데? 니가 뭔데 예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해?
이 놈 이거. 아무리 봐도 수상한데…
이거. 산헤드린 공회 사람들과 협의된 거야?
니가 이거 책임질 수 있어? 니가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거야?
만약. 그럴 수 있으면. 나한테 얘기 해.
그러면 내가 예수의 시신을 내어줄게."
그러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당돌히 이렇게 말한다.
"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제가 예수의 제자입니다.
그동안은. 예수의 이름이 부끄러워서.
내가 예수의 제자라고 밝히면. 그로 인해 내가 무슨 해를 당할까봐.
그래서. 이것을 숨기고. 은밀히 지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시신을 내어 주십시오.
내가 그분의 마지막이라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이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가. 깨끗한 삼베로 싸서.
그것을.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시게 되었다.
이것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변화된/새로운 일상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양심/마음을 깨운 걸까?
예수의 제자들이 도망치고. 한결같이 예수를 거부할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도대체 뭘 보고. 뭘 믿고.
당신이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당당히/당돌히 밝히고 있는 걸까?"
그래서. 그의 그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헤아려 보려 했는데.
그러다. 두 가지 말씀이 떠올랐다.
하나는. 신명기 21장 22절-23절 말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무엘하 21장 10절 말씀인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약. 사람이. 나무 위에 달려 죽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라"고 한 것은.
공중의 새와 들짐승이. 그 시신을 해하고.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한 사람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는. 한 사람으로서. 엄연히 존중과 존경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이것을. 말씀으로/율법으로. 엄연히 규정하고. 엄연히 시행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하 21장 10절을 보면.
아야의 딸. 리스바가.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신 곁에. 머물러 있는 장면이 나온다.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자녀들을 나무에 달아 죽이고서는.
아무도 이것을 처리하지 않고.
아무도 이것을 상관하지 않자.
아야의 딸. 리스바가. 그 곁을 지키고. 그 곁에. 끝까지 함께 한 것이다.
이에. 아야의 딸. 사울의 첩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
다윗이 그제서야. 그 사람들의 시신을 내리고.
그들의 뼈와. 요나단의 뼈를. 사울의 묘에. 함께 안장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측면에서.
오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모습이. 아야의 딸 리스바의 모습과 닮아 있는 것 같다.
"비록. 예수가. 사람들의 혐오와 증오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하더라도.
그는 엄연히. 바르게/제대로 장사를 지내야 하는데.
아무도 그의 죽음을 거들떠 보지 않고. 아무도 그의 죽음에 관심을 갖지 않다니.
이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끝까지 예수의 곁을 지키며.
그의 시신을 당돌히 요구한다.
이것이. 율법에 기록된 관례/말씀이기도 하고.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사랑. 마지막 존경의 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살아 생전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히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를 뒤로 하고.
지금이라도. 지금에라도 당장.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주를 예배하려 한다.
만약에. 내가 여기서 뒤로 물러서면.
이제 아무도 예수의 시신을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우리 주님이.
로마 군병/로마 사람들에게. 더욱 처참히. 더욱 처절하게.
짓밟히고 팽 당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당돌히 예수의 시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참 멋있지 않은가?
비록. 살아생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공개적으로 그를 따르지는 못했지만.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리고. 모든 사람이 당신을 떠나갈 때.
그럼에도 우리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당신의 곁을 끝까지 지켰으니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같기를 기도한다.
특별히 오늘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수많은 사람이 교회를 멸시하고. 조롱하는 이 때에.
우리가 당신의 제자라고 밝히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는 예수의 제자로 당당히 살아가지만.
세상에서는. 우리의 신분을 숨기고. 우리의 정체를 숨기는 경우가. 정말 허다하게 많다.
하지만. 이에 대해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나무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를 모른 척하고. 그를 쌩까고 지나갈 것이 아니라.
그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그분을 내 마음에 모셔.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해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우리 입으로 증거하고. 우리 마음으로. 또 우리 삶으로 이것을 함게 증거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수련회 둘째날을 시작하며.
오늘 우리 가운데.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우리가 입술로는 주를 따르고.
마음으로는 주를 따르고 있었지만.
그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못하던 사람들에게는.
그 주님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일들이 일어나길 바라며.
그 동안은. 우리의 정체를 숨기고. 우리의 신분을 숨기고.
우리가 살아왔다면.
이제는/앞으로는. 우리의 정체를 당당히 드러내고.
우리의 신분을 당당히 자랑하고 살아가는.
그런 내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길 소원한다.
그렇기에. 이 아침.
이 찬양을 부르며. 주님 앞에 나아간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리로. 약속한 말씀 변치않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 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오늘 하루. 우리 삶 가운데.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흘러넘치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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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45-5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것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큰 소리>로 하신 말씀이다.
인간의 허물과 죄로 인해. 죽으시는. 우리 주님이.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탄식함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단지. 우리 주님이.
십자가 형벌을 당하는 것이. 무서워서/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에 대해.
우리 주님이. 탄식하며. 절규하며. 애통함 가운데.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짐과 무게가. 얼마나 크고 중하였을지.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다시 헤아려보게 된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그에게. 큰 부담이요. 짐이요. 수치인 것은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포기하지 않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 살리며. 구원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주님은.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끝까지 이 길을 감당하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은.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다 이루었도다(요 20:30)"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참 인상 깊지 않은가?
마지막까지. 자기에게 주어진 길/십자가의 길을 감당하시고.
"하나님. 이제 내가 할 바는 다 하였으니.
그 다음은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숨을 거두시고. 목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지는가…
마치. 이형기 시인의. <낙화>에 나오는 한 소절 같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꽃이 져야. 열매가 맺히기 때문에.
열매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기꺼이. 자신의 삶을 드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내려놓는 우리 주님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고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주님의 모습은.
분명. <낙화>가 맞다.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난 다음에.
그 자리에. 아름다운 열매가. 가득 맺혔기 때문이다.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며.
백부장이. 우리 주님을 향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희생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실제로 일어나고. 실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가.
그 주님의 구원하심과 사랑을. 마음껏 노래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고.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따라가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삶을 내어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기꺼이. 기쁨으로. 내 삶을 내어드리며.
하나님 앞에. 감사의 노래로 나아가는.
그런 우리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면 좋겠다.
특별히. 오늘부터 3일 동안. 서서울지방 겨울수련회를 인도하러 가는데.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학생들 가운데 온전히 전해지면 좋겠고.
사랑하는 우리 학생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소망을 다시금 발견하고.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는.
그런 수련회 되고. 그런 은혜의 시간 되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이 찬양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 원한다.
"우리 죄 위해 죽으신 주. 십자가 그 사랑 감사하네.
날마다 주의 형상대로 변화되리라. 십자가 우릴. 새롭게 하리.
놀라운 사랑. 찬양하리라. 우리를 위해. 생명 주셨네.
놀라운 사랑. 찬양하리라. 십자가의 그 능력. 십자가의 그 능력"
오늘 하루. 그 십자가의 능력이.
오늘 우리 가운데. 소망이 되고. 구원이 되길 간절히 사모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우리 죄 위해 죽으신 주 /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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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27-44
우리는 흔히. 쉽게 달아 올랐다가. 쉽게 식는 사람들을 가리켜.
'냄비 근성'이라고 한다.
한 때는. 내 모든 것을 줄 것처럼. 열광하고 기뻐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내가 언제 그랬냐?'며. 차갑게 식고. 싸늘하게 돌아서는 것이.
'냄비근성'을 가진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성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사회학자는.
"냄비근성"이 <사회적 동조 현상>과 <지속성 기대 붕괴>라는 두 가지 특징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회적 동조 현상>이라 함은.
어떤 사안/이슈에 대해서.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사람들이 가니까. 나도 거기에. 그냥 휩쓸려서. 그냥 따라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지속성 기대 붕괴>라는 것은.
우리가 바랐던. 우리가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그것에 대한 상실감 때문에.
그것에 대해. 더 화를 내고. 더 차갑게/싸늘하게 반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냄비근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 두 가지 특징이. 동시에 나타난다.
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딘가를 향해서/무언가를 향해서. 그렇게 열광하다가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쉽게 돌아서고. 쉽게 팽한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한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은. 더 화를 내고. 더 차갑게 돌아선다.
왜냐면. "내가 그랬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이것이. 냄비근성을 가진 사람들의. 일반적인/공통적인 특징인 것이다.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이는 모습/반응이 이런 것 같다.
실제로. 우리가 복음서를 처음 열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얼마나 열광하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만 들으면.
정말 개떼처럼. 우루루 몰려왔다가.
그분이 가는 곳마다. 그분의 손을 잡기 위해서. 그분의 옷을 만지기 위해서.
그렇게 열광하고. 그렇게 소리를 질렀었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도. 크게 예외는 아니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배움을 얻고자. 한밤중에. 아무도 몰래 그를 찾아왔었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권위 앞에. 놀라고. 두려워 떨었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모습은.
이전과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한때는. 예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열광하고. 흥분했었다면.
지금은. 예수님에 대해서. 독기를 품고. 악한 마음으로.
그분께 열광하고. 그분께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한다.
"총독의 병사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도대체. 이들은 뭐 때문에. 이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한단 말인가.
도대체 예수님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이렇게. 예수님을 욕하고. 모욕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에겐. 이유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의 마음은 차갑게 식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어리석음과 미련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이렇게라도. 예수를 욕하고 조롱해야 했으며.
그렇게 예수를 욕하고 조롱할 때. 자기들도 무리 속에서/군중 속에서.
보호받고.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께 가진 관심/열기도. <냄비근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는. 뜨겁게. 정말 발갛게 달아 올랐다가.
지금은. 차갑게. 정말 차갑게 식어버린 그들의 모습….
근데. 오늘 아침. 말씀을 보는데.
이 모습이. 다른 게 아니라. 오늘 우리의 모습과도.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어제.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열광하고. 그분께 감사를 표하고.
그분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시간을 보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난 다음. 지금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오늘 우리의 마음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고백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차갑게 식은 마음으로.
그냥 행사를 치른 듯한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까?
바라기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기억하고. 그분을 따르며.
그분을 묵상하며. 그분 안에 오늘을 살아가길 바라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쉽게 그분을 잊고. 쉽게 그분을 팽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마치.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차갑게 식은 객석의 모습이라고 할까나?
한때는. 정말 뜨겁게 열광하고. 환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무대.
어쩌면. 오늘 우리 마음이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 마음이.
텅 빈 무대/텅 빈 객석과 같지 아니하고.
정말 우리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심과 뜨거운 마음으로 가득한.
그런 우리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우리 주님을 향해서.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그런 냄비 근성과 같지 아니하고.
우리 주님을 향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변함없는 마음으로.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랐으면 좋겠고.
우리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이벤트나 사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정말 오늘 우리의 일상이 되고. 소망이 되는.
그런 우리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가 되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주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을 드리며. 주님 앞에 나아가기 원한다.
"찬양의 열기. 모두 끝나면. 주 앞에 나와.
더욱 진실한. 예배 드리네. 주님을 향한.
노래 이상의 노래. 내 맘 깊은 곳에. 주께서 원하신 것.
화려한 음악보다. 뜻 없는 열정보다. 중심을 원하시죠.
주님께 드릴. 마음의 예배. 주님을 위한. 주님을 향한 노래.
중심 잃은 예배 내려놓고. 이제 나 돌아와 주님만 예배해요."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의 삶이.
이 찬양의 고백과 같길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찬양의 열기 모두 끝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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