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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15-26
'나니아 연대기'를 보면.
아슬란이. 피터를 대신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장면이 나온다.
피터가. 왕을 시켜주겠다는. 마녀의 유혹과. 터키 젤리에 빠져서.
마녀에게 자기 목숨을 내어 주었을 때에.
아슬란이. 피터를 대신해서. 자기가 죽겠다고. 마녀에게 말한 것이다.
이에. 피터가 풀려나고. 아슬란이 대신 제단에 오른다.
C.S 루이스는. 이 모습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 설명하였고.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희생을 통해서.
사단과 죄의 올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져 있는. 구속/대속의 은혜인 것이다.
오늘 본문의 기록도 그러하다.
그 당시. 명절이 되면. 무리가 원하는 죄수 가운데 하나를 풀어주는 관례가 있었는데.
이에. 빌라도는. 사람들 앞에서/무리 앞에서. 이렇게 물어본다.
"여러분. 제가 누구를 풀어주길 바랍니까?
<바라바>라 이름하는 예수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라 이름하는 예수입니까?"
빌라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넘겨주었던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의도적으로 이와 같이 질문한다.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봐도. 예수께. 아무런 잘못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풀어주고. 그를 놓아주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외친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라 하는 예수를. 우리에게 넘겨주시오."
이에. 빌라도는.
사람들의 성화에 못이겨서/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예수를 놓아주는데…
재밌는 것은. 성경 기자가. 의도적으로.
<바라바>라 하는 예수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서로 대조/비교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라바>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그 이름의 뜻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고.
<그리스도>라 하면. <기름 부은 자>라는 뜻인데.
이 말을. 두 개 붙여서 설명하면. 이렇게 된다.
"사람의 아들을 풀어주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이게 어찌 말이 되는 요구인가?
<사람의 아들>을 풀어주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니?
어찌. <죄 있는 자> 대신에. <죄 없는 자>가 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말도 안 되는. 터무니도 없는 요청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그들의 요구가.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당신의 뜻이 아니면.
공중에 있는 새 한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분이.
<사람의 아들>을 내어주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이다.
왜냐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를 사망과 죽음의 늪에서. 건지고.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주님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고 회복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리켜. 이와 같이 말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서.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주님의 은혜. 주님의 사랑 덕분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자원하심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음을 입을 수 있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기쁨으로 달리셨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납하시고.
끝까지 오래 참으시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 안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침.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우리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 그분의 이름을 부르길 원한다.
그리고. 이 찬양을 부른다.
"잊을 수 없네. 하나님의 사랑. 날 살리시려고 주신 생명.
내 십자가 지고. 오르신 갈보리 언덕. 날 향한 사랑 때문에
우리 때문에 생명 주셨고. 우리 때문에 고통당하셨네.
우리 때문에 갈보리 오르셨네. 무지한 우리 때문에."
오늘 하루. 이 찬양의 고백과. 생명의 말씀이.
오늘 우리 마음 가운데. 온전히/깊이 울려퍼지길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우리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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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1-14
가룟 유다를 생각하면.
우리는 "배신자"라는 단어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그가. 예수를 팔아. 이스라엘 종교자들에게. 그를 넘겨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니. 어떻게 예수를 팔아넘길 수 있냐?
그것도. 예수의 제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중이 되기 싫으면. 스스로 절을 떠나면 될 것이지.
왜 자기가 예수를 팔아 넘기고. 그를 처단하는 것인가?"
그런 측면에서. 가룟 유다의 모습은.
사람들의 지탄/원성을 듣기에.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가. 손가락질 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욕을 들어 먹는다는 것이다.
가룟 유다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두 번재 이미지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그는 대제사장과 장로들로부터. 은돈 30을 받았다.
예수의 몸값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일로 인해. 몹시 괴로워하고. 몹시 고통스러워 하였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래서. 그는.
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스스로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예수를 팔아 넘긴 것에 대한. 자책과 자괴감 때문에.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자기의 삶을 마무리 한 것이다.
이에. 우리는. 가룟 유다의 삶을 평가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니. 그럴 거면. 왜 예수를 그들의 손에 넘겨 주었나?
이제 와서. 후회하고 반성하면 무엇한단 말인가. 이미 엎어진 물인 것을…
회개하는 방식도 그래.
스스로 목숨을 끊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 되는 것인가?
그게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
자기가 뭔데 스스로를 심판하고 판단한단 말인가?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그래서. 우리는 가룟 유다를 생각할 때마다.
손가락질하고. 그를 조롱하기 바쁘다.
하나는. 그가 '배신자'라는 이유 때문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잃고. '자살/자결' 하였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이런 것들을 다 뒤로 하고. 4절 말씀을. 더 묵상하고 싶다.
실제로. 4절을 보면. 가룟 유다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죄 없는 피를 팔아 넘김으로. 죄를 지었소."
이것은. 단순히 가룟 유다가.
자기 양심이 부대낀다거나. 자기를 책망하고. 후회하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가. 정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고.
내가. 에수를 팔아 넘김으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가룟 유다가. 반드시/분명하게/바르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하나님 앞에. 또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 앞에.
자기 죄를 고백하며. 자기의 잘못을 정직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에 대한.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은.
"그래서. 그게 뭐?"라는 반응이다.
그들은. 가룟 유다의 말을 진심으로/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고.
오히려. 가룟 유다의 말을 비웃으며. 그를 조롱하고. 멸시하였다.
아마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한심한 놈. 바보. 쪼다.."
이에. 가룟 유다는. 스스로 물러나.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보이는. 가룟 유다의 반응만은.
정말 진심이고. 정말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이제 와서. 그 때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고.
그 후회와. 참회/회개의 방식이. 너무 안타깝고.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의 회개와. 그의 진심만은.
정말 거짓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물어보는 것 같다.
"과연. 우리가. 가룟 유다를 비난하고. 손가락질 할 자격이 있을까?
과연. 우리는. 가룟 유다보다 나은 사람일까?
우리는. 가룟 유다와 뭐가 다를까?"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그를 십자가에 넘겨주었는데.
사실. 우리도. 예수를 배반하고. 그를 십자가에 넘겨주었다.
예수를 넘겨주는 댓가로. 가룟 유다가 은 30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를 넘겨주고(신앙을 타협하면서).
내 것을 취하고. 내 것을 욕심부린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떠넘기고. 스스로 책임을 무마하려 한다.
"내가. 직접 예수를 넘기지 않았고. 내가 직접 예수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미워했고.
우리의 캄캄한 마음이. 그를 몰랐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무지한 채찍질로 그를 내리쳤고.
우리의 악독한 혀가 그를 정죄했으며.
우리의 폭력의 손길이. 그몸 멍들게 때렸고.
살인자의 본받아. 우리가 그를 찔렀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그래서. 뭐?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냐?"며.
"그것은. 그대의 문제고. 가룟 유다의 문제라"고. 발뺌하며. 뒷걸음질쳤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어찌 보면. 가룟 유다가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볼 지도 모른다.
"나는.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스스로 목숨을 잃고. 자결을 하게 되었는데.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당신의 잘못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 게 더 큰 잘못 아니오?
물론. 나처럼. 해서는 안 될 것이오.
스스로 목숨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안 될 일이오.
만약.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우리 주님께 가서. 우리 주님께 용서를 구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고 싶소.
그래야 했고. 그게 맞는 방식이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
아무런 양심에 거리낌도 없이. 아무런 잘못도/자책도 없이 살아가는 게 더 큰 문제지 않소?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오.
그렇기에. 내가 당신들에게 바라는 한 가지가 있다면.
나처럼. 살지 마시오.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처럼 살지도 마시오.
당신에겐. 아직 기회가 있으니.
우리 주님께 가서. 우리 주님께 용서를 구하시오.
그러면. 우리 주님이.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오…"
그런 측면에서. 오늘 가룟 유다의 목소리가.
내 마음에. 내 귀에. 더욱 생생히 들리는 것 같다.
나는. 또 우리 공동체는. 주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1) 나는.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처럼.
무관심한 모습으로/무감각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2) 아니면. 가룟 유다처럼.
주님 앞에 돌이키긴 하지만. 잘못된 방식으로/아쉬운 선택과 결단을 하고 있을까?
3) 아니면. 주님 원하시는 것처럼.
주님 앞에 나아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다시금 돌이키며. 돌아가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까?
바라기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과 같지도 아니하고.
가룟 유다와 같지도 아니하고.
정말 주님 앞에서. 바르게 돌이키고. 진심으로 돌이키는.
그런 내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면 좋겠다.
오늘 하루. 우리 주님의 그 은혜가.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 가운데. 온전히 흘러넘치길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우리의 어두운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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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69-75
예수께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가실 때.
베드로도. 그 곁에. 함께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어떻게 되시는지.
그 결말이. 너무 궁금하고.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인들 곁에 자리를 잡았다(마 26:58).
참 베드로답지 않은가?
다른 제자들은. 모두 산산히 흩어지고.
저마다. 제 갈 길. 자기 살 길을 마련하고 있을 때에.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와서.
예수의 결말/결국이 어떻게 되는지. 함께 살피고.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참 대단하지 아니한가?
그런 측면에서. 그는. 주님께 큰 소리칠 만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끝까지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은. 모두 주님을 부인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당신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던. 그 베드로 말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베드로의 다짐도. 삽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된다.
실제로. 오늘 베드로가 보여주는 모습이 그렇지 않은가?
사람들이. 자기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때는.
자기는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예수 곁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자.
베드로는.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을 숨기기에 급급하다.
1) 이에.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 아니오?"라는 질문에.
베드로는. <여러 사람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2) "이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 맞는데?"라는 질문에.
베드로가. <맹세하여> 예수를 부인하고.
3) "당신의 말투를 보니. 당신은 틀림없이 예수와 한 패요"라는 질문에.
베드로가. <화를 내며>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며> 그를 뿌리친다.
참 안타깝지 않은가?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당당하게. 예수의 곁을 지키던 사람이.
순식간에. 예수를 증오하고. 그를 멸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근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게 인간의 모습이고. 그게 인간의 연약함인 것 같다.
실제로. 오늘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보이는 반응도 이와 같지 않은가?
교회 안에서는. 예배를 드릴 때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절대로 당신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사람이.
교회 밖을 나가면. 어느새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고.
사람들 틈 사이에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있을 때는.
나혼자 주님을 예배하고. 나 혼자 주님을 경배하던 사람이.
사람들이. 자기에게. 공개적으로 신앙을 물어오고.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 발톱을 세우고. 칼날을 들이댈 때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을 멸시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는.
어찌보면. 그 영역이. 너무 작고. 왜소한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입으로는.
주께서 이 땅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계신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주님을 고백하고. 왕 되신 주님을 섬기는 시간/영역은.
<교회의 예배 시간>과.
<오늘 내 마음 속의 일부. 침묵의 시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 주님은.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오늘 우리에게 묻고. 다시금 질문하시는 것 같다.
나는. 교회 안에서/성도들 안에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로 고백하는가?
아니면.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일상 속에서도.
주를 믿고. 주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가?
나는. 무언의 고백으로. 침묵의 고백으로만 주를 믿고 살아가는가.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고.
우리 주님과 함께. 그분과 더불어 오늘을 살아가는가?
바라기는.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바깥으로 나가서. 몹시 울었던 베드로와 같지 아니하고.
끝까지. 예수님의 자리를 지키고. 끝까지 예수님과 동행했던.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여자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마 27:55-56).
그래서. 오늘 우리 삶이. 눈물과 슬픔과. 자기 반성과 후회로 얼룩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우리 주님의 부활과 영광을. 우리 눈으로 생생히 목격하고. 생생히 증거하는.
그런 우리가 되고. 그런 우리 인생이 되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이 찬양의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길 기도한다.
"주님 손에. 맡겨드리리. 나의 삶. 주님께.
주님 손이. 나의 손 붙드네. 나 주의 것. 영원히.
내가 믿는 분. 예수. 내가 속한 분. 예수.
삶의 이유 되시네. 내 노래 되시네. 전심으로."
오늘 하루. 그 주님이. 오늘 우리의 노래가 되시고.
오늘 우리의 삶의 이유가 되시길 바라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주님 손에 맡겨드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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