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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12.23 :: 2022.12.23(금) 마 27:1-14

마 27:1-14

가룟 유다를 생각하면.
우리는 "배신자"라는 단어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그가. 예수를 팔아. 이스라엘 종교자들에게. 그를 넘겨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니. 어떻게 예수를 팔아넘길 수 있냐?
그것도. 예수의 제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중이 되기 싫으면. 스스로 절을 떠나면 될 것이지.
왜 자기가 예수를 팔아 넘기고. 그를 처단하는 것인가?"

그런 측면에서. 가룟 유다의 모습은.
사람들의 지탄/원성을 듣기에.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가. 손가락질 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욕을 들어 먹는다는 것이다.


가룟 유다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두 번재 이미지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그는 대제사장과 장로들로부터. 은돈 30을 받았다.
예수의 몸값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일로 인해. 몹시 괴로워하고. 몹시 고통스러워 하였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래서. 그는.
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스스로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예수를 팔아 넘긴 것에 대한. 자책과 자괴감 때문에.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자기의 삶을 마무리 한 것이다.

이에. 우리는. 가룟 유다의 삶을 평가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니. 그럴 거면. 왜 예수를 그들의 손에 넘겨 주었나?
이제 와서. 후회하고 반성하면 무엇한단 말인가. 이미 엎어진 물인 것을…
회개하는 방식도 그래.
스스로 목숨을 끊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 되는 것인가?
그게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
자기가 뭔데 스스로를 심판하고 판단한단 말인가?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그래서. 우리는 가룟 유다를 생각할 때마다.
손가락질하고. 그를 조롱하기 바쁘다.

하나는. 그가 '배신자'라는 이유 때문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잃고. '자살/자결' 하였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이런 것들을 다 뒤로 하고. 4절 말씀을. 더 묵상하고 싶다.

실제로. 4절을 보면. 가룟 유다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죄 없는 피를 팔아 넘김으로. 죄를 지었소."

이것은. 단순히 가룟 유다가.
자기 양심이 부대낀다거나. 자기를 책망하고. 후회하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가. 정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고.
내가. 에수를 팔아 넘김으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가룟 유다가. 반드시/분명하게/바르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하나님 앞에. 또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 앞에.
자기 죄를 고백하며. 자기의 잘못을 정직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에 대한.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은.
"그래서. 그게 뭐?"라는 반응이다.

그들은. 가룟 유다의 말을 진심으로/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고.
오히려. 가룟 유다의 말을 비웃으며. 그를 조롱하고. 멸시하였다.
아마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한심한 놈. 바보. 쪼다.."


이에. 가룟 유다는. 스스로 물러나.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보이는. 가룟 유다의 반응만은.
정말 진심이고. 정말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이제 와서. 그 때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고.
그 후회와. 참회/회개의 방식이. 너무 안타깝고.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의 회개와. 그의 진심만은.
정말 거짓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물어보는 것 같다.

"과연. 우리가. 가룟 유다를 비난하고. 손가락질 할 자격이 있을까?
과연. 우리는. 가룟 유다보다 나은 사람일까?
우리는. 가룟 유다와 뭐가 다를까?"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그를 십자가에 넘겨주었는데.
사실. 우리도. 예수를 배반하고. 그를 십자가에 넘겨주었다.
예수를 넘겨주는 댓가로. 가룟 유다가 은 30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를 넘겨주고(신앙을 타협하면서).
내 것을 취하고. 내 것을 욕심부린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떠넘기고. 스스로 책임을 무마하려 한다.
"내가. 직접 예수를 넘기지 않았고. 내가 직접 예수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미워했고.
우리의 캄캄한 마음이. 그를 몰랐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무지한 채찍질로 그를 내리쳤고.
우리의 악독한 혀가 그를 정죄했으며.
우리의 폭력의 손길이. 그몸 멍들게 때렸고.
살인자의 본받아. 우리가 그를 찔렀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그래서. 뭐?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냐?"며.
"그것은. 그대의 문제고. 가룟 유다의 문제라"고. 발뺌하며. 뒷걸음질쳤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어찌 보면. 가룟 유다가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볼 지도 모른다.

"나는.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스스로 목숨을 잃고. 자결을 하게 되었는데.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당신의 잘못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 게 더 큰 잘못 아니오?

물론. 나처럼. 해서는 안 될 것이오.
스스로 목숨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안 될 일이오.

만약.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우리 주님께 가서. 우리 주님께 용서를 구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고 싶소.
그래야 했고. 그게 맞는 방식이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
아무런 양심에 거리낌도 없이. 아무런 잘못도/자책도 없이 살아가는 게 더 큰 문제지 않소?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오.

그렇기에. 내가 당신들에게 바라는 한 가지가 있다면.
나처럼. 살지 마시오.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처럼 살지도 마시오.
당신에겐. 아직 기회가 있으니.
우리 주님께 가서. 우리 주님께 용서를 구하시오.
그러면. 우리 주님이.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오…"


그런 측면에서. 오늘 가룟 유다의 목소리가.
내 마음에. 내 귀에. 더욱 생생히 들리는 것 같다.
나는. 또 우리 공동체는. 주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1) 나는.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처럼.
무관심한 모습으로/무감각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2) 아니면. 가룟 유다처럼.
주님 앞에 돌이키긴 하지만. 잘못된 방식으로/아쉬운 선택과 결단을 하고 있을까?
3) 아니면. 주님 원하시는 것처럼.
주님 앞에 나아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다시금 돌이키며. 돌아가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까?

바라기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과 같지도 아니하고.
가룟 유다와 같지도 아니하고.
정말 주님 앞에서. 바르게 돌이키고. 진심으로 돌이키는.
그런 내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면 좋겠다.

오늘 하루. 우리 주님의 그 은혜가.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 가운데. 온전히 흘러넘치길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우리의 어두운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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