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 5:14-19

아닥사스다 왕. 20년부터 32년까지.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유다 총독으로 근무하였다.
특별히. 그는. 백성들의 처지와 현실을 너무 잘 알았기에.
총독으로서 받아야 할 녹의 혜택을 받지 않기로 하였다.
자신의 권리를 내려 놓기로 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고.
자기가. 스스로 짐을 지기로. 결단한 것이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악습'이 끊어지고.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느헤미야 이전의 총독들은. 그러하였다.
"백성에게 힘겨운 세금을 물리고.
먹을 것과 마실 것 외에도.
하루에 은 40 세겔씩. 백성에게. 거둬들이곤(15절)" 하였다.
목자가 아니라. 삯꾼이었다.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백성의 피를 빨아먹고 산 것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이번 기회에. 한 몫 단단히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윗 대가리가 그 모양이니. 아래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15절).
중간 관리자들도. 자기 몫을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 그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살아가는 게. 제일 속편한 일이다.
"다 그렇게 한다"고. "어쩔 수 없다"고. 그저. 그렇게 묻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백성들의 입장에선. 더욱 고달플 수밖에.
한 놈이 아니라. 수십명. 수백명이. 그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이 고리를 끊었다.
위에서 본을 보이니. 아랫사람들도 뜻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들은. 성벽을 쌓는 일에만. 오롯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자정 능력이 생기고. 이스라엘 공동체에 평화가 찾아오게 된 것이다.


말씀을 읽으며.
"느헤미야는.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을까?" 되물어보게 된다.

어떤 사람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느헤미야는. 부양 가족이 따로 없지 않았을까요?
혼자 살았으니까. 그게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실제로. 느헤미야 6장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 같은 몸이면. 성소에 들어갔다가는. 절대로 살아 나올 수 없습니다(느 6:11)"

도대체 어떤 몸이었길래. 느헤미야가 '나 같은 몸'이라고 말할까?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느헤미야가 '고자'이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당시 바벨론 환관 가운데. 대다수는. 내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의 규례에 의하면. 고환이 상하거나. 음경이 잘린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신 23:1).

그러니. 느헤미야는.
내시로서. 혈혈단신. 혼자 살지 않았을까 추정하곤 한다.
그러니. 처자식을 돌볼 책임도 없고.
그 역할과 책임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말이다.
100% 사실/진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도리어.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오늘 본문 15절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두려워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15절)"

사실. 이것이 근본적인 이유다.
느헤미야는. 하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옛 사람들의 관습대로. 살지 않았다.
도리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따라. 그 필요에 맞게 산 것이다.
필요 이상의 무거운 짐을. 백성에게 지우지 않고.
총독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역할과 책임만 다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평화가 찾아왔다.
하나님 나라의 공의. 샬롬이 찾아왔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문화가. 시작되게 된 것이다.


말씀을 읽으며. 나는/우리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되물어 보게 된다.
오늘날. "부의 대물림", "세습 중산층 사회"가 되어가는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아랫 사람의 피를 빨아 먹으며.
억압과 착취와. 폭력과 지배의 역사가 반복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오늘 우리 곁에. 부당하게 이뤄지고 있는. 만연한 문화는 무엇일까?

사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부분에 대해. 근심하고. 고민해야 한다.
예전에도 그랬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잘못된 문화는. 뿌리 뽑고. 과거와 단절하여야 한다.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고. 새로운 사회 질서가 필요하다.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다.
내가 먼저. 리더십이 먼저 본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물이 썪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건강히 흘러갈 수 있다.
나는/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 측문에서. 느헤미야의 삶과 사역이.
우리에게 '딴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으면 좋겠다.
자족하고. 감사하며. 베풀고 섬기는 것이.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면 좋겠다.
'사랑은. 더 가지지 않고. 참으로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삶이. 그러하기를.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평화가 흘러가기를. 소망하며.
주님께. 내 삶을 드린다.

(feat.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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